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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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깊은 숲이 우거졌을 것이지만, 가을을 지나 세모가 되니 앙상한 활엽수의 모습이 스산하다. 그 사이에 ‘유루(留樓)’라는 오랜 건물이 있다. 근대 중국의 위대한 스승 유월(兪樾, 1821~1907)이 살던 곳이다. 송백(松栢)이라도 몇 그루 있으면 세한(歲寒)과 송무백열(松茂栢悅)의 정(情)을 느끼겠지만, 대청의 두 기둥에 걸린 대련만 객에게 말을 건다. ‘천고일시인(千古一詩人), 문장유교신유도(文章有交神有道). 호변삼묘택(湖邊三畝宅), 청산위옥수위린(靑山爲屋水爲隣).’ 옛날 시인 한 사람이 있었다. 문장은 신과 도를 나눌 정도였다. 호수 곁 3묘의 땅에 집을 마련했더니, 청산은 집, 물은 이웃이 되었지. 기개로 보면 명종 시대 진묵대사(震黙大師)가 떠오른다.

천금지석산위침(天衾地席山爲枕), 월촉운병해작준(月燭雲屛海酌樽).

대취거연잉기무(大醉居然仍起舞), 각혐장수괘곤륜(却嫌長袖掛崑崙).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삼아 바닷물을 술잔에 붓는다.

크게 취해 조용히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 춤을 추면,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리지나 않을까?

당의 시인 장계(張繼)는 한산사(寒山寺)에 풍교야박(楓橋夜泊)이라는 칠언율시를 남겼다.

월락오제상만천(月落烏啼霜滿天), 강풍어화대수면(江楓漁火對愁眠).

고소성외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 야반종성도객선(夜半鐘聲到客船).

달이 지니 까마귀 우는데 찬 서리가 하늘에 가득하네.

강교와 풍교에 매어둔 고기잡이배 마주 보며 시름겨운 잠을 청하는데,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는 한밤중을 알리는 종소리가 객이 탄 뱃전에 닿네.

장계가 이 시를 지은 후 많은 사람이 초저녁부터 배를 타고 놀다가 밤이 깊으면 한산사의 종소리와 고기잡이배에서 비치는 불빛의 시청각적 아름다움을 즐겼다. 언젠가부터 시인이나 명사들은 한산사를 찾으면 시를 짓지 않고 장계의 풍교야박에 공감하는 비문을 쓰는 관례를 형성했다. 그 이상의 절묘한 표현이 없다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공감하는 그 멋스러움에 가슴이 시원해진다. 그러나 같은 비문이라도 글씨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한산사는 유월(兪樾 1821~1907)의 글씨를 대표작으로 인정해 별도로 큰 비석을 세웠다. 매끄럽고 부드러워서 사랑하는 여인과 마주 앉아 쓴 것 같다.

유월은 절강성 출신으로 자를 음보(蔭甫)라 했다. 만년에 그는 노자의 “곡즉전(曲則全), 왕즉직(枉則直)” 굽은 것이 온전하고, 구부러져야 곧게 된다는 말을 받들어 스스로 호를 곡원거사(曲園居士), 또는 곡원수(曲園叟)라고 지었다. 1850년에 진사가 돼 한림원의 서길사(庶吉士)로 들어갔다. 젊은 유월은 원칙주의자였으므로 편의를 원하는 사람들과 부딪쳤다. 관직에 염증을 느낀 그는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소주의 자양서원과 항주의 고경정사가 그의 터전이었다. 고경정사는 청대 경학의 집대성자 완원(阮元)이 설립했다. 스승으로서 유월은 철저한 모범을 보였다. 30여년을 하루처럼 검소하게 살면서 교육에 전념했다. 학문은 경학과 사학에서 제자백가와 문자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심오했다. 그러나 조금도 교만하지 않았으며,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다. 학문의 종지는 물론 철저한 실행을 강조하는 그를 추앙해 수많은 인재가 몰려왔다. 3000명이 넘는 제자 가운데는 장태염(章太炎)과 팽옥린(彭玉麟)도 포함된다. 청조정의 관리들도 모두 그와 교류하기를 원했다. 일본의 학자도 그의 제자가 돼 훗날 유신파 지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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