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서상진 세계잡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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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예> 창간호 (서상진 소장본) ⓒ천지일보 2022.12.29

"책에게도 삶이 있다. 작가가 아버지라면 장정가는 어머니다. 인쇄소는 자궁이다. 누군가 표지를 여는 순간 책은 책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어떤 책은 끝까지 다 읽히지 못하고 자신의 비밀을 간직한 채 서가에 잠들어 있다. 어떤 책은 책장마다 무수한 삶의 흔적을 지닌다. 어떤 책은 복되게도 여러 주인을 섬긴다. 물과 불과 칼과 햇빛과 습기와 벌레와 짐승이 책을 병들게 하거나 해친다. 책의 가장 큰 적은 사람이다. 무지한 한 사람은 한 권의 책에 상처를 내고 무지한 100명의 사람은 다락방에 책을 넣고 잊어버리고 무지한 1만 명의 사람은 도서관을 불태운다. 책은 죽을 때 소리를 낸다.(오수완의 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중에서)"

마치 나를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내게서 듣기 원하는 질문들의 종합 같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에서는 특히 위 문장의 아랫부분이 사람들의 관심거리일 것이다. 특히 어떤 경로를 통해 책을 구입하는지와 그 책으로 환산 가능한 금액들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 공주가 되어줄 수 없어 고민스러웠다. 그럼 오늘 <신문예(新文藝)>는 위 문장의 절차를 밟아 소개해볼까.

<신문예 목차>
평론 – 문화에 있어서 봉건적 잔재와 투쟁임무(임화), 문학과 언어창조(이원조), 조선혁명의 현계단(정재민), 조선연극의 역사적계급(안영일)

시 – 파도소리 헤치고(김기림), 땅(윤곤강), 벙어리(김태규),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조영출), 헌사(최인철), 소(이승철), 희망(박동화), 시굴사람의 노래(이용악), 일흠도 모르는 누이에게(오장환), 새날의 노래(안열파)

예술 – 미술계의 신출발(고희동), 洋畵壇의 지향(김만형), 공예의 조선적 사명(김재석), 적赤군을 환영함(김남천), 전몰동포에게 보내는 글(윤규보), 내가본 소련사(박찬찬), 꼴키-의 관전연설(앙드레지드), 여름밤(막씸·꼴키)

수필 – 건국유감(안동수), 건설단계에서의 국미의 의무(문두호)

창작 – 道程(이봉구), 희곡 – 두뇌수술(진우촌)

잡지 <신문예(新文藝)>가 규정한 예술가
작가가 아버지라면 편집인은 누굴까. 신문예는 잡지이기 때문에 여러 명의 아버지를 두었다고 봐야겠다. 아니면 안열파라는 편집인을 아버지로 할까, 혹은 박동화라는 발행인을 아버지로 할까. 잡지는 여러 명의 아버지를 둔 것이므로 작가들을 태아를 만드는 유전적 요소들로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렇게 <신문예>는 두 명의 아버지와 어머니격인 인쇄인 김경수의 몸에서 열 달을 채우고 ‘신문예사’라는 자궁을 통해 1945년 12월 1일 세상에 나와 책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거의 다 월북 작가들로 구성된 그 유전적 요소들로 보아 진보진영의 순수문예지의 성격이 드러난다. 평탄치 않을 그의 삶을 예견한다. “축 창간, 조선좌익서적출판협의회, 학병동맹, 조선인민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선푸로레타리아예술동맹”이라는 인쇄가 아직도 붉은 테두리 안에 선명하다. 누가 이 책의 처음 주인이었는지는 모르나 이 책은 아마도 여러 주인의 손을 거쳤을 것이 틀림없다. 표지 아랫부분이 1센티미터 정도 뜯겨져 나간 흔적이 있고 세워놓으면 기둥격인 옆면의 표지는 다 닳아져서 그가 거쳐 온 신산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해방의 감격과 기쁨을 논한 뒤에 예술이란 무엇일까? 특히 순수예술이란 무엇일까? 예술가란 표현함으로써 예술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인간의 진리 이것에 관련되는 모든 문제를 끝까지 추궁해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될 가히 숙명적인 것이 곧 진정한 예술가에게 부여된 과제일 것이다. 어제는 제국주의 일본의 황국신민이면서 오늘날에는 조선인민이라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는 곧 예술로 하여금 생의 목적에 달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위장했을 따름이지 진정한 예술가라 일컬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창간사는 정실과 패거리로 힘을 보이는 문단의 폐단을 지적한다. 이런 지적을 서슴없이 하던 그들이 모두 사라진 문단은 이후 그런 폐단을 고질병처럼 안고 성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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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암 시선집 ⓒ천지일보 2022.12.29

新文藝로 더듬어 보는 궤적
1990년대 중반으로 기억되는데 KBS 가요무대 자문위원인 김점도 선생으로부터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이름은 주경환, 그는 시인 조영출의 사위라 했다. 장인의 자료를 찾고 있는데 도와달라며 찾아왔다. 조영출은 시인이면서 대중가요의 작사가요 희곡작가로 1913년 충남 아산출생이다. 한때는 승려생활을 하기도 한 분인데 북한에서 교육문화성부상(전 문화체육부 차관)까지 지낸 고위직 인사이다.

지금도 자주 불리고 있는 수많은 대중가요의 작사가로, 그가 발표한 노래가 무려 500여 곡이 넘는다. 부모님 세대에서 애창되던 황금심 씨의 ‘알뜰한 당신’ ‘선창’ ‘고향초’ 등을 조명암, 금운단, 이가실, 조영출 등의 이름으로 발표를 한 분이다. 마침 내게 그분의 자료들이 있어 찾아줬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주경환 씨는 장인에 대한 글을 발표할 때마다 필자의 이름을 잊지 않고 거들어주니 ‘골방의 책 사낭꾼’은 보람을 느낀다. 후손의 그런 열심히 있어서 이동순 시인이 2003년에 조명암 시선집을 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소장한 잡지 가운데는 나오자마자 몹시 핍박을 받은 잡지들도 있는데 그것들의 상처가 참으로 못 볼 양상들이다. 어떤 것은 지면이 온통 검은 줄로 그어져 있거나 공란으로 남겨져 있고 당연히 그 수도 적다. 당시 신문예처럼 진보를 표방하는 잡지들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지는 운명을 예감 못한… 하지만 그 때 그렇게 남겨진 자료가 있었기에 이후 꾸준히 해금을 요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이런 작품들을 볼 수 있게 되었지 싶다. 한 목소리로만 들리는 세상을 허용했다면 문단의 발전은 지금보다 더 답보상태일지 모른다. 그런 이유들로 진보 진영의 책들은 희귀본이 되었고 지금 얼마나 살아남아서 누군가의 책장에 꽂혀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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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 (서상진 소장본) ⓒ천지일보 2022.12.29

내가 아는 어떤 분은 남들 다 학교 갈 때 형편이 여의치 못해 기술을 익혔다. 그런데도 그분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울 때가 많다. ‘훌륭한 학벌도 아닌데’하며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학교 대신 시골의 서당에서 배움을 익히셨다고 했다. 나는 그 분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지식에 대한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책이 인문고전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책들도 언젠가는 현재의 맞춤법에 맞게 교정되어 다시 출간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들의 시대는 바로 고전에서 힘을 얻던 시대였기에 말이다. 약관의 나이로 책을 내고 민족을 안내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인문고전이 중요하다는 지적과 자성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는 요즘이기에 그런 날이 언제나 올지 자못 궁금하다.

<신문예>는 해방 직후 서울에서 결성된 좌익계열의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인 ‘문학’이 나오기 전에 교두보적인 역할을 한 잡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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