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산성, 환도산성 방불 많은 치성 구축
단군의 참성대는 민족을 지킨 기복 성지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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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고구려 창건 설화어린 전등사

성 내에는 381(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됐다고 전하는 전등사(傳燈寺)가 자리 잡고 있다. 몽고병란 때인 고려 고종 46(1259)년에 이 성안에 이궁(離宮)을 지었으나 현재는 유지만 남아 있다. 취재반은 전등사 사고지 남쪽 건너편 약간 높은 대지에서 많은 덤벙 초석과 네모진 전(塼)돌, 적색의 고려시기 와편을 찾아 이 일대를 이궁지로 추정했다. 

고려 건물지에서 적색와편을 쓴 것은 건물의 장엄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전돌은 건물 안팎을 포장 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 초기 왕찰(王刹)이었던 충주 숭선사지(崇善寺址)에서도 적색 와편이 다수 발굴된 바 있다. 숭선사는 고려 태조 비 신명순성왕후(광종의 모) 유씨(劉氏)의 원찰로 왕실에서 지은 사찰이다.

고려 적색 와편은 고구려 와편에 비해 무늬가 다르며 두께가 두껍다. 건축물에 적색기와를 쓴 것은 건물의 장엄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는 고구려 궁전 축조의 전형으로 고려 왕실에서도 계승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남한 지역에서 불교도입 초창기인 고구려 소수림왕 시기 창건했다는 가람의 역사는 찾기 힘들다. 전등사 사전에 따르면 381(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기록은 믿을 수는 없지만 고구려 불교도입과 사찰의 역사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전에 따르면 1266(원종 7)년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1282(충렬왕 8)년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하여 송나라의 대장경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했으므로 절 이름을 전등사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그 뒤 1337(충숙왕 복위6)년과 1341(충혜왕 복위2)년,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1605(선조 38)년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이 소실되었다. 1613(광해군 5)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하여 1625(인조 3)년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 숙종 4(1678)년에는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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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에서 발견한 와편

프랑스 군대 격퇴한 정족산성

정족산성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격전지로 유명하다. 고종 3(1866)년 10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했다. 대원군은 총사령관인 도순무사에 이경하를 임명하고 중군 이용희와 천총 양헌수에게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로 향하게 했다. 이용희는 강 건너 김포 문수산성에 진을 쳤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는 문수산성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말았다. 

조선군 부대는 새벽에 정족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산성을 지키고 있던 200여 명의 승군(僧軍)과 합류했다. 이러한 정보를 뒤늦게 입수한 프랑스 제독은 160명의 해병을 이끌고 정족산성을 점령하도록 지시했다. 한편 정족산성 성벽에 몸을 숨긴 조선군들은 남문과 동문으로 접근하는 적이 사정권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한다.

한편 정족산성에서 퇴각한 프랑스군은 결국 함대 철수를 결정한다. 거듭된 패전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피로가 쌓였던 탓이다. 선교사 살해에 대한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한 지 20여 일 만에 철수하고 말았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 초지진은 비극의 현장이 되었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조선 수군이 많이 희생되었다. 조선 해안 병사들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미국군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총탄을 막기 위해 솜을 넣어 만든 갑옷에 불이 붙자 바다로 뛰어든 것이 화근이었다. 물을 먹은 솜 갑옷으로 병사들은 많이 익사하고 말았다. 

미군은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하여 포대를 점령한 다음, 다시 북진하여 광성진을 공격했다. 백병전까지 포함되었던 이 싸움은 대단히 치열하여 조선군은 53명이 전사하고, 미군 측도 3명이 전사,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다시 초지진을 야습하여 미군선박을 물리치자, 미국 측도 강화도 점령이 무모함을 깨닫고 음력 5월 16일 40여 일 만에 강화에서 물러갔다. 이 두 번의 양요에서 승리한 대원군은 더욱 척화를 강화하고 외세와의 교류를 단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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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강화 역사의 재평가

강화는 예부터 곡식이 잘 되는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고려 말~조선 초기 문신 정이오(鄭以吾, 1351~1434)가 쓴 <관아(官衙) 기문>에도 나온다. 

“강화부는 기내(畿內)에 속하였다. 사면이 바다로 둘렸는데 토지는 기름져 언덕·산·갯벌·평지가 있고 식물이 풍부하여 콩·보리·벼가 잘 된다.”

강화에서 생산되었던 인삼이 고려인삼이라고 하여 옛부터 인기를 얻은 것은 유명한 얘기다. 중국에 가는 사신이나 역관들이 지니고 간 고려인삼은 화폐 대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연경의 조선 사신이 묵는 객관에는 고려인삼을 사려는 장사꾼들이 장사진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강화인삼은 특별히 주문·재배되어 일반인이 구하기 힘들다. 

필자는 강화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학술조사를 다시 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강화군내의 선사유적부터 재조사 발굴해야 한다. 단군시대라면 4000~5000년 전의 역사다. 바로 신석기·청동기시대를 말한다. 

강화 고인돌 개수는 현재 모두 150개가 조사되고 있다. 70개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청동기 시대 이미 강력한 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주민들이 대규모로 거주했을 집 자리도 상당수 있을 게다. 

이번 삼랑산, 전등사 답사 중에 남문 안쪽에 있는 암반군 하나에서 성혈이 30여 개나 만들어진 남방식 고인돌 덮개돌을 발견하는 수확이 있었다. 성혈끼리 이어진 혈도가 찾아진 것도 큰 수확이다. 이렇듯 조사 안 된 고인돌 수는 더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고려 고종 이궁지(離宮址)는 전등사 한편에 안내판도 없이 방치되고 있다. 흩어진 초석, 적색 와편이 무심하게 뒹굴고 있다. 성벽을 다시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곳을 발굴하여 규모를 파악하고 잘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리산 혈구(穴口)’에 대한 고증과 역사적 가치도 새롭게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고구려가 대륙 남방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천단(天壇)을 구축하여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던 것이 아닐까. 

5세기 후반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며 백제 한성을 지배한 후에는 이곳 강화를 중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북조(北朝)에 대한 일방적 수교를 지양하고 남조(南朝)와도 교류를 넓혀 폭 넓은 문화를 받아들였다. 지금의 강화는 고구려의 입과 같은 관문 역을 담당했을 게다. 

정족산성, 즉 삼랑산성은 이름이 말해주듯 고구려 호국 정신이 깃든 왕성에 버금가는 포곡식 성 유적이다.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침공했을 때 왕은 이 성에서 웅거하며 성벽을 더 공고히 쌓았다. 고려는 강화에서 39년간을 버티며 1000년 사직을 공고하게 다졌다. 이는 세계전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그것은 난공불락의 고구려 성을 계승한 고려국인들의 강인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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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에서 발견한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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