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산성, 환도산성 방불 많은 치성 구축
단군의 참성대는 민족을 지킨 기복 성지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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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아 강화 땅 옛 시인들의 노래

인천광역시 강화군은 역사 유적의 보고(寶庫)이자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우리민족의 시조 단군 설화가 어린 참성단(塹星壇)이 하늘과 맞닿은 듯한 명산 마리산(혹은 마니산)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수천 년 민족을 지킨 제단이자 기복신단이다. 단군의 성지가 왜 섬 강화에 있는 것일까. 

고려 삼은(三隱) 중 한 분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시가 <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 사단(祠壇)편에 실려 있다.

향 피우고 맑게 앉아 시 읊으며

머리를 갸우뚱하니

한 방이 비고 밝은 데

작기가 배 같으네

가을 빛을 사랑하여 지게문 열고 들어가는데

다시 산 그림자 맞아들여 뜰에 가득하게 마물게 하네(중략)

만장이나 되는 제천단에 밤기운이 맑았는데

녹장(푸른 종이에 쓴 축문)을 아뢰고 나니 

티끌 생각 잊었네

돌아가는 말 안장에 장생(長生)할 복 가득실어라 

우리 님께 바치어 태평성대 이룩하네

- <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 사단(祠壇)편에 실린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시 中 

 

참성단을 찾아 하늘에 제사를 올린 목은 이색. 돌아오는 길에 고려왕에 충성스런 감회를 남긴 것인가. 끝내 이성계에게 충성하지 않은 충신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초기 세종 때 문신 권맹손(權孟孫)은 쓸쓸한 성터를 돌며 감회를 적었다. 

“옛 나라는 바다가 둘렸고 빈 성엔 푸른 멧부리만 늘어섰네.”

<고려사> 지리지는 강화도의 마리산(摩利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마리산이 부의 남쪽에 있다. 산 정상에는 참성단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 지내시던 단이라 한다(有摩利山. 在府南. 山頂有塹星壇, 世傳檀君祭天壇).”라고 하였다.

참성단에 관한 기록은 고려 때 여러 문헌에도 나타난다. 고려 후기에 이암(李嵒)이 만든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이 분이 단군이다. 제천단을 쌓고 강화도 마리산에 삼랑성(三郎城)을 쌓으시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시대 학자 이종휘(李種徽)의 시문집인 <수산집(修山集)>의 동사(東史)에는 “제천단은 강화도 마리산에 있으니, 단군이 혈구(穴口)의 바다와 마리산 언덕에 성을 돌리어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천단이라 이름 하였다.”고 썼다. 

참성단에 대한 여러 기록을 열거해 본다. (두산 백과사전 참고)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校書郎) 경유(景瑜)가 말하기를 “‘대궐을 마리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의 복조(福祚)를 늘게 하리라’함에 명령하여 이궁(離宮)을 그 산 남쪽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인조 17(1639)년에 개수축(改修築)하였다고 했다. 1700(숙종 26)년에 또 개수축하여 비를 세웠다. 비문에 “동녘 땅 수천리 전체를 둘러서 강도(江都)가 보장지중지(保障之重地)가 되고, 강도 수백리 전체를 둘러서 마리가 으뜸가는 명산이라. 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드니 이른바 참성단이라. 세상에서 전하되 단군께서 쌓아 제단으로 하여 한얼께 제사지낸 곳이라 한다. 돌이켜보건대 오랜 연대가 흘러 비바람에 깎이고 허물어져서 서북쪽 태반이 무너지고 동쪽 층계가 또한 많이 기울어져서… 선두포별장(船頭浦別將) 김덕하(金德夏)와 전등사총섭(傳燈寺總攝) 승 신묵(愼默)이 주로 맡아 고쳐 쌓으니 20일 만에 일을 마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참성단에서 초제(醮祭)가 베풀어진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1264(원종 5)년에는 국왕이 친히 행행하였으며, 공민왕 때 문신 경복흥(慶復興)이 이곳에서 초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 변계량이 지은 <삼청청사(三淸靑詞)>에는 “참성에 제단이 있으니 춘추로 초례를 봉행하나이다. 이는 국법의 상례로서 나의 마음에 겸연 하옴은 이곳은 신이 계시는 곳이라(塹城有壇, 又謹春秋之醮, 此國典之常爾, 於余心猶慊然, 玆卽所居)”고 하여 참성단이 천신, 즉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산군일기>에는 “별들에게도 제사를 지냈다(星辰醮祭)”는 기록이 전한다. “마리산의 집 짓는 일은, 성신에게 제사지내고 신께 제사 지내는 곳이니 중도에서 그만 둘 수 없다(摩尼山營繕, 乃爲祭星·祭神之所, 不可停罷.).”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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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강화도 전경

고구려 땅 혈구군

강화군은 본래 삼국이 정립했을 때는 고구려 혈구군(穴口郡)이었다. <동국여지승람> 연혁조에 다름과 같이 기록된다.

“본래 고구려 혈구군인데 갑비고차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 때 해구라 고치고 원성왕이 혈구진을 설치하였다(本高句麗 穴口郡 一云 甲比古次, 新羅 景德王 改 海口, 元聖王置 穴口鎭).”

강화라는 이름은 고려 현종 9년에 지은 것으로 이때 현(縣)이 되었다. 고종 9년 몽고군이 침공했을 때 도읍을 정하고 군으로 승격하여 강도(江都)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원종 때에는 왕도 송도(개경)에 속했으나 고려 말 충렬왕 때 인주(仁州, 인천)에 합병하였다가 복구됐다. 

‘혈구’란 ‘굴의 입’이란 뜻이다. ‘수혈신(隧穴神)’은 고구려인들이 모시는 신이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고구려에는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으니 이를 수혈이라 하였다. 10월 국중대회에 수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으로 돌려보내 제사를 지내는데 신좌에 나무로 수신을 안치하였다(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 國中大會, 迎隧神, 還於 還於國東上, 祭之, 置木隧於神坐).”는 기록이 있다. 

언어학자들은 혈구를 해안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서울대 임홍빈 교수는 논문에서 배가 드나드는 ‘나루(津)’로 해석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혈구군 외에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했다고 기록된다. 

갑비는 ‘혈’이며 古(고)는 口(구)와 같이 썼다. 차(次, 혹은 此)는 성이란 뜻이다. 차를 ‘성’으로 쓴 경우는 강원도 양구의 고구려식 지명인 요은홀차(要隱忽此)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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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산성 항공사진

삼랑산성 고구려 초축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족’이란 고대 세발 달린 솥을 가리킨다. 한나라시대부터 한반도에도 삼국시대 많이 유행한 그릇의 모양이다. 

설화를 종합해 보면 단군은 세 아들 부루, 부소, 부여를 이곳에 보내 성을 쌓게 했다는 것이다. 정족산성을 삼랑성(三郎城)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이 성을 설명한 자료를 보면 성의 길이는 2300m다. 고구려성의 일반적인 포곡식성의 형태를 보여준다. 백제가 처음 축조했다면 테메식이었을게다. 

고구려 축성이라고 해도 도성에 버금가는 큰 성이다. 이 지역에 많이 산출되는 화강암, 수성암, 편마암등을 벽돌처럼 다듬어 축조하였다. 성 축조방식을 보면 영월 정양산성, 단양 온달성 등지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신라가 축조한 보은 삼년산성과 비교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방식이 전혀 다르다. 옆으로 긴 장방형 돌은 중국 오녀산성 등 고구려 성벽에 이용되었던 돌과 닮아 있다. 

글마루 취재반과 한국역사문화연구회는 성벽 주위를 답사하며 고구려 역사의 잔영을 찾기에 분주했다. 문헌이나 설화를 보면 고구려 축성이 분명하여 많은 적색와편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취재반은 성 서편 일부 보수공사 구간을 제외한 약 2㎞에 달하는 성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정연한 석축과 곳곳에 많은 치성(雉城), 곡성(曲城)의 유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성의 상면은 마차가 다닐 수 있는 크기로 인도를 만들고 판축한 구조가 나타난다. 잡석이나 할석을 넣어 진흙으로 다진 것이다. 이런 형태는 삼국시대 성 축조방식의 전형이다.

또 북쪽 성벽을 지그재그 식으로 축조한 치성은 흡사 중국 지안 통구하에 있는 환도산성의 남벽 구조를 닮고 있다. 이런 형태는 남한지역 여러 고구려 성에서도 나타나는데 포천 반월성의 구조를 닮고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군이 이용했을 때는 바다로 들어오는 당나라 해군을 이 성에서 효과적으로 제압했을 것이다. 

성안에서는 여러 점의 토기편과 와편이 산란하고 있었다. 북문지 성문 밖에서 고려시기 와편과 토기편들이 많이 수습된다. 땅속에 묻힌 탓인가. 고구려 적색와편은 찾기 힘들었다. 다만 일부 작은 와편에서 사격자문이 양각된 문양이 보였다. 정연한 고구려식 석축과 치성들이 고구려 잔영을 입증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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