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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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압사

석구상은 어느 시대 유물인가

호암산성 안에는 동편에서 오르는 좌측에 석구상(石狗像)이 있다. 방형의 석 난간 안에 잘 모셔진 이 석상은 조선시대 한양의 화기를 막는 해치상으로 회자되어 왔다. 이 석상에는 설화가 전한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있었는데 완공 직전에 이르면 건물이 허물어져 내리는 일이 반복됐다. 이성계가 목수들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목수들은 밤마다 호랑이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나 사납게 날뛰며 궁궐을 부수는 꿈을 꾼다고 하소연했다. 어느 날 한 노인(혹은 무학대사)이 이성계에게 나타났다. 그는 한강 남쪽의 호암산을 가리키며 그곳 호랑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성계는 “호랑이는 본시 꼬리를 밟히면 꼼짝하지 못하는 짐승이다.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라는 노인의 조언대로 호압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안심이 안 됐던 모양이다. 호암산 북쪽 7리 지점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고 불러 호랑이를 겨냥하는 활로 상징화했고, 다시 북쪽의 10리 지점에는 호랑이를 견제하는 사자암(獅子庵·동작구 상도동)까지 조성했다.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끄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았던 해치상은 기록과 유적이 발견돼 돌로 만든 개 즉 ‘석구상(石狗像)’으로 결론이 났다. 즉 한우물 발굴 당시 쌓아놓은 석축에 거꾸로 박힌 명문이 찾아진 것이다. 명문은 고졸한 예서로 쓴 ‘석구지(石狗地)’였다. 용추 혹은 한우물로 전해져온 우물지가 바로 석구지였던 것이다. 이 명문을 찾으면서 해치상은 개상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필자는 이 석구상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석구상보다는 시기를 훨씬 올려 볼 수 있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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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성 석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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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옥제상(왼쪽), 위진남북조시대 옥제상

고구려에서는 부여의 전통을 계승한 오부족(五部族)이 지배계급을 형성했다. 즉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대가(大加)가 그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언급했지만 이들 세력에 의해 국가조직이 운영됐다. 

고대에서도 ‘개’는 이미 인간과 가장 밀접한 애완동물로 사랑을 받아왔다. 당나라 귀부인들은 지금의 풍속처럼 개를 기르는 것이 유행했다. 물론 고구려에서도 이 같은 풍속이 유행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남북조 시기 출토된 옥제 구상(狗像. 사진) 또는 당나라 유물인 옥으로 만든 구상(사진)에서 호암산성 석구상과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의 머리 모양이나 앉은 자세가 닮고 있다. 

축대돌에 각자 된 ‘석구지(石狗池)’의 글씨는 조선시대나 신라인들이 즐겨 쓰던 해서체가 아니다. 보은 삼년산성 남문지 암벽에 각자된 신라 명필 김생(金生)의 글씨로 추정되는 ‘아미지(蛾眉池, 사진)’와 비교해도 다르다. 

석구지 명문의 네모반듯한 ‘石(석)’자는 고대 중국 동한(東漢, 25~220년) 시기 고비(古碑)인 서협송(西狹頌)이라고 불리는 황룡비(黃龍碑)에 나오는 ‘石(사진)’자를 그대로 닮고 있다. 동한은 3세기 초까지 존속했으며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 

또 ‘구(狗)’의 경우는 해서체라기보다는 예서체(隸書體)로 남북조시기 유행한 육조체(六朝體, 사진)이며 ‘지(池)’자도 한대(漢代) 지양령장군비(池陽令張君碑, 中国书法大字典·隶書卷)의 글씨를 닮고 있다. 서울대 조사단의 견해대로 조선시대 석수장이 이를 각자했다면 육조체를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비약적인 해석이라고 하겠다. 벽돌처럼 다음은 돌과 예서 형태의 글씨 등은 고구려 시기 한우물 재축조 당시의 소작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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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구지(石拘池)가 각자된 석재가 거꾸로 복원됐다.

석구지에서 출토된 명문 수저

호암산성 한우물지(석구지)는 백제 시기에는 본래 작은 형태의 우물이었으나 고구려 점령 후 많은 물을 저수하기 위해 확장하여 조성한 것으로 상정된다. 이 같은 우물을 만들었다면 성안에 있는 상주 인구의 숫자가 상당수였음을 알 수 있다. 

장방형의 대형 우물지는 정연한 성돌처럼 다듬어 쌓아 올렸다. 흡사 오녀산성에 있는 천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오녀산성의 우물지보다 더 크고 깊다. 초축의 벽돌은 발굴로 드러난 것으로 동편에 있는 축성의 석축을 연상시키고 있다. 동편 석벽을축조할 당시의 형태로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이 한우물의 석축 시기도 시대의 상한을 끌어 올려야 한다. 

서울대 조사단이 우물지에서 매우 주목되는 유물을 발굴했다. 청동제 수저를 찾아냈는데 수저의 손잡이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확인되었다. 

‘잉벌내역지내말(仍伐內力只乃末)’

잉벌내의 역지(力只)는 사람 이름이고, 내말(乃末)은 신라의 관직 이름으로 육두품에게 주어지는 지방 관직이다. 이 수저는 당시 잉벌노현의 현감 역지라는 사람의 수저였던 것이다. 이 청동수저는 잉벌내가 신라에 병합되자 귀부하여 내말이란 관직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신라 지배하에서 고구려 성주가 신라에 귀부하면 직책을 받고 대우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 같은 예는 경상북도 순흥읍내리 고분 벽화에서도 확인되었다. 직급을 인정해 주면서 그대로 통치하도록 했던 것이다.

발굴을 담당했던 서울대 보고서는 이 우물을 신라양식으로 보았다. 산성 안 제1우물터의 석축구조가 674년에 만들어진 안압지의 석축구조와 거의 유사하여, 산성의 축조 시기가 문무왕 때로 나당전쟁에 대비한 관방시설로 추정된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 석축구조는 현재 축조 당시의 원형이남아 있는 남동쪽 모서리의 경우 모두 13단으로 쌓여 있으며, 석축의 맨 아랫단은 20㎝가량 내어 쌓고 위로 가면서 들여쌓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축조방법은 안압지의 축조방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오녀산성 천지의 석축 방식과 석구지의 모양이 비슷하여 고구려인들의 축조로 보자는 것이다. 오녀산성 우물지도 장방형이며 외곽을 벽돌처럼 다듬은 돌로 쌓아 올렸다.

호암산성에서는 고려시대의 유물도 많이 발견되었다. 보고서를 보면 그중 중국 화폐인 희령원보(熙寧元寶)가 주목된다. 희령은 북송(北宋) 신종(神宗)의 연호로 1068년에서 1077년까지 사용되었으므로 고려 문종 연간에 해당된다. 이때는 고려와 송이 활발한 대외무역을 하던 시기로 당시의 화폐가 호암산성에서 발견됨으로써 고려시대 국제무역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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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성 한우물

많은 시인이 사랑한 금천

고려 시인 이규보(1168~1241)는 명문장가로 금천을 사랑했다. 낭만파 시인이었던 그는 자를 춘경(春卿). 호를 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으로도 불렀다. 벼슬은 정당문학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지냈다. 호탕 활달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하였다.

 

금천을 지나면서 멋진 시를 남겼다. 

 금주 좋을 시고

 봄 경치가 어찌 그리 기이한가

 작약은 애교가 많아 아름다움을 다듬고

 해당은 잠이 많아 비뚜로 드리웠다.

 술잔을 잡고서 꽃다운 시절을 아끼노라

 고양(皐壤)이 비옥한데

 기름지고 윤택한 것은 못물에 힘 입는다

 습속이 비록 제나라 땅과 같이 느리나

 백성들은 많이 노대와 같이 명랑하다

 굶주리고 배부른 것으로 

 편하고 위태함을 점을 치리

삼복의 날씨에도 호암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많은 것에 놀랐다. 호암산을 사랑하는 이들이 현대에도 이규보처럼 많구나 생각된다. 젊은이들보다는 중년 혹은 노년의 등산객들이 많았다. 처음 산성을 조사하는 길이어서 잡초가 우거져 석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취재반은 한참이나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방황했다. 그냥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취재반은 호암산 등산길에 밝은 한 초로 등산객 도움으로 동쪽에 국축된 석축을 찾을 수 있었다. 석축은 잡초 속에 숨어있어 수줍게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취재반이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니 정말 놀라운 모습이 드러났다. 그 속에는 1500년 전 고구려 전사들의 숨결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고색창연한 석축은 빛나고 있었다. 서로를 의지하며 천 수백년을 지탱한 모습은 대견하기만 하다. 온갖 외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천 수백년을 버텨온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력이 아닌가. 우리의 눈물겨운 역사를 반추하는 감격이 벅차올랐다. 

문화재 당국에서 동편 석축이 노출된 일대의 잡초를 제거하면 많은 부분의 석벽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대로 두면 더 많은 부분이 도괴될 위험마저 있다. 또 성안의 수많은 건물지를 발굴하여 백제~고구려~신라 역사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건물지에 박혀있는 수많은 연질 와편과 적색와편은 이 성의 초기 역사를 입증하는 유물이다. 백제 토착세력을 몰아내고 석성을 구축하여 요새로 삼은 잉벌노현, 고구려의 잔영이다. 왜 학계와 문화재당국은 고구려라는 이름을 애써 도외시하는 것인가. 

고구려사를 자국의 지방사로 왜곡하는 중국학계의 집요한 획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구려와 신라, 백제는 전혀 다른 민족이라고 우긴다. 고구려를 계승한 북벌의지의 고려사를 인정하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우리 학계는 아직도 잠을 자고 있다. 한국 역사연구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도 이 시대 우리의 중차대한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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