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안에 많은 건물지… 백제, 고구려 와편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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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

시흥은 고구려 잉벌노현

서울 금천구 시흥은 고구려 지배 아래서는 ‘잉벌노(仍伐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왜 잉벌노라고 했을까. 잉벌노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고구려 잉벌노라고 했으면 정말 고구려 유적이 남아있는 것일까. 

‘잉벌노’는 이두문자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곡양현(穀壤縣)은 본래 고구려의 잉벌노현(仍伐奴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개명하여 현재는 금주(黔州)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잉벌노가 ‘곡양’으로 변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금주가 됐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잉벌이 ‘풍요로운 곡식이 많은 지역’을 지칭한 것일까. 

일부 학자들은 잉벌을 ‘시흥(始興)’의 이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즉 발전하는 신흥 지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노(奴)에 대한 해석이다. 이 ‘노’에 대한 견해도 언어학자들 간에 백가쟁명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잉(仍)’은 귀족적 자녀를 지칭했다. 즉 고대 왕족의 귀족적 가정을 이렇게 표현했다는 것이다(仍, 形声字. 从人 这里指王孫贵族的子女 : 右邊是 ‘乃’, 表示喂奶. 其造字本義是指古代王孫贵族的家庭云云). 또 ‘노(奴)’는 여성 노예를 지칭하는 글자로도 해석되었다. 

그러나 한 언어학자는 삼국시대 ‘노(奴)’라 함은 후대의 노비와 같은 것이 아니라 개인 내지 공동체 간의 정치·군사적 신종관계를 대변하고 있으며, 읍락의 지배층은 하층 성원을 ‘노’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 

고구려가 지배한 신 지역에 대해 ‘노’를 붙인 곳은 지금 진천의 고명인 ‘금물노(今勿奴)’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및 <여지도서> 충청도 진천현(鎭川縣) 조에는 “만노군은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으로 수지(首知), 신지(新知)라고도 하며 경덕왕 때에 흑양군(黑壤郡)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즉 이 기록에서 보이는 ‘노’가 후대에는 ‘양(壤)’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흑양군은 바로 금물노 즉 ‘거문노’의 한자식 표기가 된다. 

금천구 동편에 있는 산은 호암산(虎巖山)이다. 호암산은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금주산’ ‘금지산’ 혹은 ‘호압산’으로도 불렸다. <여지승람> 기록에는 범 모양과 비슷해 이 같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금천 동쪽에 있는 산의 우둑한 형세가 범이 가는 것 같고 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호암(虎巖)이라 부른다. 술사가 보고 바위북쪽 모퉁이에다가 절을 세워서 호갑(虎岬)이라 하였다(하략).”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백제, 고구려시대 금천지역을 지킨 진산이 바로 호암산이었다. 해발 325m라고 하나 삼성산과 능선으로 연결돼 매우 험준하다. 호암산에 구축된 호암산성이 바로 백제 고구려 시기 이곳을 지킨 이들이 주거하던 곳이었다. 글마루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취재반은 7월 30일, 35도가 넘나드는 혹서를 무릅쓰고 호암산 유적 조사에 나섰다. 

학계에서 신라성지라고만 알려져 왔던 호암산성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혹 고구려 잉벌노의 역사적 잔영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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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성 석축

호암산성 고구려 요새로 추정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 고적조에 “호암산고성(虎巖山古城)이 있으며 그 성안에는 한 못이 있는데 가뭄이 심하면 비 내리기를 하늘에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호암산고성, 석축 주 일천육백팔십일척 성내 유 대지 천한도우(虎巖山古城, 石築 周 一千六百八十一尺  城內 有 大池 天旱禱雨).”

산성 유적은 조그만 봉우리를 최고봉으로 하고 있으며,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한 면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성의 동북은 관악산과 삼성산의 험준한 봉우리들로 막혀 있으며, 서북·서남·서쪽은 안양천(安養川)을 끼고 발달한 넓은 평지를 이룬다. 또 산성터 정상에서 날씨가 맑은 날 서쪽을 바라보면 멀리 소래포구 일대의 해안선이 보인다. 또 북쪽으로 한강을 건너 용산과 남산 그리고 북한산까지 조망된다. 

이곳 산성지와 한우물(天井)이라는 용추(龍湫) 등은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의해 1989년 10월과 1990년 3월 두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보고서를 인용하면 “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인데, 성벽의 총 연장은 약 1.25㎞이고 성벽은 표고 325m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테뫼식 산성이다. 현재 산성터 안에서 확인된 유구는 우물터 2개소와 건물터 4개소이다. 발굴된 두 우물터는 호암산성이 처음 축조되었을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물이 출토되어 성의 축조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안양과 금천 일대의 평야를 관할하는 요새지로서 서쪽의 해안과 북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글마루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취재반은 이 산성의 동편에 구축된 석축을 찾는 데 성공했다. 동편에 구축되어 있는 성축은 정연한 화강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들려쌓기로 축조한 것으로 전형적인 고구려 축성 방식을 닮고 있다. 

삼년산성이나 충주산성 남산성에서 보이는 신라 석축과는 다른 모습이다. 오히려 만주 일대 여러 고구려 산성의 축성방식을 그대로 닮고 있는 것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성의 위쪽 지역으로 올라가면서 드러나는 수많은 건물지였다. 이 건물지로 보아 호암산성 안에서는 매우 많은 인구가 살았음을 알려준다. 

건물지 곳곳에 박혀있는 와편들은 원삼국시대 적색 토기편에서부터 백제 연질 와편, 연질 토기 조각, 고구려 적색와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때로는 신라, 고려 와편까지 보이나 조선시대의 것은 하나도 찾아지지 않는다. 신라 와편도 적색 와편에 비해 소량 산견되고 있다. 

이 와편으로 보아 호암산성을 처음 축조한 이들은 백제인들로 추정된다. 서쪽 능선에 구축된 판축성은 백제인들의 솜씨다. 크고 작은 할석을 넣고 흙으로 다져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했다. 성의 서편에는 자연적인 치성(稚城)을 이룬 곳도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도 건물지로 추정되는 일대에서 와편이 드러나 있다. 

취재반이 조사한 와편 가운데는 ‘大’자 명문도 보이며, 시대로 보아 고려시기 것으로 추정된다. 정서로 찍은 글씨는 해서체로 여러 자가 찍혀있다. 나머지 글씨는 완전하지 않아 해석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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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성에서 찾아진 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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