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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의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이 지난달 17일 증축을 마치고 개관해 대중들에게 공개됐다. (제공: 강진군) ⓒ천지일보 2022.12.11

[지역명소] 강진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증축 마치고 지난달 17일 대중 공개

상설 전시장, 4D영상관, 수장고 등

 

전시장, 전라병영성·하멜·병영문화

3가지 테마, 17~18세기 사회상 見

 

마천목 장군이 축성한 전라병영성

치성·해자·함마갱, 외부 침입 막아

[천지일보 강진=김미정 기자] 한국을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보고서’의 저자 핸드릭 하멜(Hendric Hamel). 네덜란드가 고향인 하멜은 1653년 무역을 하러 나섰다가 풍랑을 만나 조선에 약 14년 동안 억류돼 있었다. 이 중 7년을 강진에서 있었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척박한 땅에서 살아야 했던 네덜란드인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는 낮은 땅이라는 의미다. 국토 1/4이 해수면보다 낮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척박한 땅에 풍차를 지어 물을 끌어올리거나 곡식을 가공하는 등 에너지로 활용했다. ‘세상은 신이 만들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이 만들었다’는 데카르타의 명언도 이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포기하지 않는 끈기 있는 정신은 하멜을 결국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

전남 강진군 병영면에 있는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강진의 하멜 동상의 손은 마치 고향으로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일념이라도 보여주는 듯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향해 있다. 반대로 네덜란드에 있는 하멜기념관의 동상은 강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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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강진=김미정 기자]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앞에 있는 하멜 동상. ⓒ천지일보 2022.12.11

전남 강진군의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은 2007년 8월 개관했다가 ‘강진 하멜촌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2017년부터 증축을 시작했다. 지난 11월 17일 하멜기념관은 증축을 마치고 개관해 대중들에게 공개됐다. 새로 증축된 하멜기념관은 상설 전시장과 4D 영상관, 수장고, 기획전시실, 교육실로 구성돼있다. 상설 전시장은 전라병영성, 하멜, 병영문화 3가지 테마로 꾸며졌다. 청화백자 접시와 같은 전라병영성 출토 유물부터 17~18세기 네덜란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머그잔, 나침반과 같은 생활용품까지 110여점의 전시물을 만나볼 수 있다. 이에 본지는 최근 강진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을 찾았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희망 잊지 않아

네덜란드 호르큼시에서 태어난 하멜은 동인도회사의 서기였다. 하멜은 1653년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했다. 하멜기념관에서 만난 안종희 해설사는 “스페르베르호를 승선했을 당시 하멜의 나이는 20세였으며 표류했을 때의 나이는 23세였다”며 “배를 타기 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3년 동안 서기를 했던 하멜이기에 조선의 문화나 풍습, 언어 등에 대해 세밀하게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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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강진=김미정 기자] 하멜이 탔던 스페르베르호를 본떠 만든 조형물 앞에서 안종희 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2.12.11

기념관에는 당시 하멜이 탔던 스페르베르호를 본떠 만든 조형물이 있어 배를 보며 당시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다. 

안 해설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인구는 약 200만 정도밖에 안 됐지만, 포르투갈이나 영국 같은 나라와도 전쟁해서 이겼다”며 “국토 1/4이 바다보다 낮은 척박한 땅에서 그들은 풍차를 만들어 농토로 쓸 수 없는 곳에 목초를 심어 소를 기르고 치즈를 생산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정신으로 하멜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15명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안 해설사는 또 “17세기 초에는 향료 무역을 많이 했는데 네덜란드가 세계 최초로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며 “인도의 여권에는 정향나무의 꽃과 가지가 그려져 있을 만큼 대표적인데 당시 이 향료 때문에 네덜란드가 영국과 전쟁을 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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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강진=김미정 기자] 네덜란드 신발. ⓒ천지일보 2022.12.11

우리나라의 나막신과 비슷한 모양인 네덜란드의 신발과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입었던 의상도 전시돼있다. 안 해설사는 “네덜란드 신발은 나무로 만들었지만 아주 편하다”며 “땅이 질척하니 일반 신발은 신을 수 없다. 굽을 높게 하고 보습과 잘 마르는 버드나무로 만들어 신었다”고 설명했다.

하멜 일행이 언어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어떻게 적응하며 살았을까. 안 해설사는 “하멜 일행이 가장 친하게 지낸 사람은 스님들이었다”며 “조선의 풍습이나 언어, 음식 등을 스님들에게서 습득했다”고 말했다. 이어 “하멜의 보고서에 보면 조선시대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대나무를 짚고 곡을 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고, 일반 나무토막을 들고 곡을 하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라는 기록까지 해놨다”며 “심지어 조선의 임금 이야기까지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고 전했다. 

◆마천목 장군의 이야기부터 전라병영성까지

전라병영성은 설성, 세류성이라고도 한다.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광주에 있던 전라병영을 1417년(태종17) 강진으로 옮기고 성축 축조했다. 안 해설사는 “조선개국과 정란공신인 마천목 장군이 이곳에 성을 축성해야 하는데 땅이 계속 무너지자 고민하다 잠깐 잠이 들었다”며 “일망대에서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이 떨어진 곳을 가보니 화살 박혀있는 주위로 하얀 눈이 있어 ‘여기에 성을 쌓으면 붕괴하지 않겠구나’해서 지었다고 ‘설성’이라 불린다”고 설명했다. 또 “세류라는 말은 버드나무 가지가 많은 것처럼 훈련이 잘된 군사들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라며 “임금이 사찰을 왔는데도 직속 상관의 명령 없이는 문을 열어줄 수 없다고 해 상관의 명령이 떨어진 후에야 문을 열어줬다. 이에 임금이 나중에 칭찬하며 전라병영성같이 단단하고 정신력이 튼튼한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해 세류성이라 불린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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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목 장군과 마천목좌명공신녹권에 대해 설명된 전시관. (제공: 강진군) ⓒ천지일보 2022.12.11

마천목 장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안 해설사는 “마천목은 고려말의 무신이었으며 조선 태조 초에는 대장군이 돼 1398년과 1400년,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훈으로 좌명공신에 책록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1401년 공신도감에서 마천목에게 발급한 ‘마천목좌명공신녹권’은 보물 제1469호로 태종이 자신을 도운 47명을 좌명공신으로 칭하하고 4등급으로 나눠 포상했는데 마천목 장군은 3등 공신을 받았으며 47명에게 발급된 것 중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천목좌명공신녹권에는 공신호의 부여와 등급별 포상내용, 특전 등이 기록돼 있어 공신도감의 조직 및 운영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또 마천목이라는 이름에 대해 안 해설사는 “그가 태어난 장흥(지금의 보성) 생가에 우물이 있는데 아버지 마영이 우물 속에 떨어진 오동나무 잎을 주워보니 벌레가 갉아먹은 자국에 ‘천목’이라고 되어 있어 하늘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생각해 하늘 천(天)에 기를 목(牧)자를 써서 ‘천목’이라 지었다고 전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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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병영성에 대한 전시물. (제공: 강진군) ⓒ천지일보 2022.12.11

전라병영성은 조선시대 약 500년 동안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를 관할했던 육군의 총지휘부였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병영성 아래 배를 탄 선착장이 있어 물자와 사람이 많이 모여 많은 왕래가 있었다. 안 해설사는 “기록에 의하면 당시 3000호까지 있었다”며 “이사 와서 살면 병역을 면해줘 더 많은 사람이 몰리니 자연히 왜구들의 표적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성을 보호하기 위해 치성이 있고 해자와 함마갱이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이고 특이한 것이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연못으로 만든 것이고 함마갱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붙인 이름으로 함정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까지 64개의 함마갱이 발견됐는데 최대 2.5m 깊이의 구덩이 안에 뾰족한 죽창들을 꽂아 그 위를 덮어 위장해 적군이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고 덧붙였다. 즉 함마갱이 1차로 적을 막아주고 해자가 2차로 적을 막아줬던 것이다. 안 해설사는 “해자 안에도 목익(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말뚝)으로 뾰족하게 해 함부로 건너오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전라병영상인도 당시 남부 최대 상인으로 알아줬다. 안 해설사는 “붓을 열 자루 가지고 나가면 1년 먹을 식량을 벌어오고 산모가 순산이 안 되면 기름통이나 자루 같은 것을 들먹이면 순산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술이 뛰어났다”며 “북에는 북송상, 남에는 남병상이라는 말도 이렇게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객사의 경우 기둥으로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데 지금의 기둥보다 2배 정도로 컸다고 하니 복원이 된다면 장황하고 웅장한 백사가 되지 않을까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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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강진=김미정 기자] 병영돼지불고기와 10여 가지가 넘는 반찬으로 차려진 불고기 한상차림. ⓒ천지일보 2022.12.11

한편 전라병영성 인근 식당에는 병영돼지불고기거리가 조성돼 강진의 병영불고기 맛을 느낄 수 있다. 연탄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운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감칠맛에 불맛까지 느낄 수 있다. 병영돼지불고기는 조선시대 현감과 병마절도사의 일화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강진 현감이 친조카가 전라병영성 최고 책임자인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자 지위가 낮은 탓에 부임 축하 인사를 하러 가자 조카가 현감을 웃어른으로 모시며 양념이 잘 된 돼지고기를 내놨는데 이후 병영에서는 손님이 오면 돼지불고기를 내오는 전통이 생겼다고 한다. 매콤한 양념에다가 연탄불에 구워낸 맛이 일품이다. 여기에 10여 가지가 넘는 반찬에 전라도 홍어까지 가격은 저렴하지만 제대로 된 불고기 한상차림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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