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군 노산성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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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노산성 중앙에 있는 곳으로 마치 로마 원형 경기장을 방불케 한다

완연한 고구려 축조 성벽

답사반은 무너진 북쪽 성벽을 시작으로 성 주위를 답사했다. 무너진 성 돌은 거의가 다듬지 않은 돌로 구축한 것이었다. 급하게 쌓은 것으로 보아 조선 선조 당시 임진전쟁 때의 축조로 상정된다. 이곳에서도 적색의 고 와편은 수없이 산란하고 있다.

북편 끝에서는 비교적 큰 치성(雉城)이 확인됐다. 크게 타원형을 이룬 것인데 군데군데 벽돌모양의 성돌이 눈에 띈다. 남쪽으로 연결된 석축은 풀이 우거져 성돌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고대의 구축했던 호형(弧形)의 성벽을 보축한 흔적이 보인다. 

성의 남쪽 성벽도 잘 남아있으며 이곳에서도 많은 고대 와편이 산란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흡사 단양 온달산성에서 소백산을 바라보는 정경과 비슷하다.

답사반은 성 안으로 오르는 층계 입구 왼쪽에서 완전하게 보존된 석축을 찾을 수 있었다. 몰래 숨어 있는 듯 모습을 드러낸 석축은 수줍게 웃으며 답사반을 맞이하는 것만 같다. 커다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엇갈리게 드려쌓은 성벽은 천수백년 풍우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정연한 축조방식은 영월 정양산성(왕검성), 단양 적성 그리고 홍천 대미산성의 축조방식과 비슷하다. 

성벽 아래서는 다수의 와편이 산란한데 성벽 위 건물지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생각된다. 적색의 기와가 주류를 이루며 문양은 선조문, 사선문, 격자문 등 다양한 고구려계로 나타나고 있다. 잡초와 등나무 줄기들을 제거하면 고대에 구축된 성벽이 완연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평창군 문화재 당국의 노력이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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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노산성에서 찾아진 적색및 회색 선조문 와편. 적색은 고구려계 와편, 회색은 신라 와편. 

선조 때 권두문 군수와 노산성

노산성은 조선 선조 때 왜군과 항거한 호국유적으로 전사에 기록된다. 임진전쟁 당시 평창군수는 권두문(南川 權斗文, 1543~1617)이었다. 그가 군수로 부임한 것은 1592년 3월. 임진왜란은 그해 4월 13일 발발하였고, 한성이 함락된 것은 5월 1일이었다. 왜군 제4진이 삼척에 도착한 것은 7월경으로, 권두문 군수는 노산성을 보수하고 군병을 정비하는 등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왜군이 평창에 침입한 것은 8월 7일이다.

임진왜란 당시 평창 노산성 전투 기록은 문헌마다 다르다. 2003년 발간된 <평창군지>에는 ‘삼척 두타산성 싸움을 치른 왜병들은 임진 음력 8월 7일 백복령을 넘어 정선군 지역을 약탈하면서 평창 동북쪽 44리에 있는 성마령과 그 북쪽에 있는 별패재를 통과하여 평창군 지역으로 쳐들어 왔다. 임진년(1592) 3월에 부임한 평창군수 권두문은 기존의 노성산성을 중수하고 민관군 수백명을 거느린 채 노성산성에 웅거하면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여만리 쪽에서 들어온 왜군의 군세가 강하여 성이 파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성안에 세워진 ‘임진노성전적비’에는 “군수 권두문은 선조 초 김광복이 축성하였다는 길이 1364척 높이 4척의 이 노성을 진지로 왜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나라에 대한 걱정과 의로운 분노에 가득차 일어난 백의 의병이 구름같이 모여 이 노성을 하얗게 덮었으며 여기 의병을 지휘 통솔한 장수는 우응민, 이인서였다. 왜군과 일전을 마다하지 않은 백의 의병은 그대로 격렬한 싸움을 치러 왜병의 목을 수없이 베었으나 따라서 의병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아 성 주변은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결국 왜군은 여만리 쪽으로 야습하여 강을 건너 침입불가하다고 믿었던 절벽을 기어올라 조총 등으로 성을 함락하고 말았다.

권두문의 <남천문집> 제2권 ‘호구일록(虎口日錄)’은 8월 7일 응암굴로 피신하여 왜군의 칼을 맞아 부상을 입은 상태로 포로가 된 후,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것을 리얼하게 기록한 난중일기다. 약 40여 일간의 고통스런 행적이 나타나고 있다. 동굴에 피신하여 싸운 순간을 기록한 일기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8월 11일 (맑음)

미명을 기해서 왜장이 맞은편에 포진하니 왜병이 산의 위아래로 가득차고 적의 선봉은 이미 산곡을 지나 외대에 오르려 한다. 산마루에서 큰 돌을 굴리고 작은 돌과 모래를 퍼부었으나 왜는 대에 오르려고 총을 쏘니 탄환은 비오는 듯하며 양군이 함성을 외치니 천지가 캄캄하고 천약이 진동을 한다. 지사함, 우응민, 이인서, 지대충 모두 총알을 맞아 쓰러지고 고언영의 활은 탄환을 맞아 부러졌다. 다른 활을 잡아 쏘려고 할 때 또 탄환을 맞아 부러졌다. 겨우 몸만 피했다. 나머지 병사는 대오를 잃고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채 굴 안으로 쫓겨 들어왔다. 적도는 이미 외대에 오르고 선봉은 나무로 잔도를 만들어 아래 굴로 들어갔다. 굴 안의 남녀들은 손을 묶어 구금하였다. 작은 상굴 입구에서 칼을 뽑아들고 나를 나오라고 독촉했다. 아래 굴에서 윗 굴까지는 세척이나 된다. 아래와 위의 사다리로 적이 오르려 한다. 나는 언영에게 활을 쏘라고 명령하였다. 언영이 활을 당기니 적들은 자빠지며 엎어지며 언덕 밖으로 물러갔다. 이렇게 하기를 8~9차례 반복하였다. 

상하굴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심히 높아서 나란히 기어오를 수는 없다. 굴의 입구에서 1~2명의 왜병이 보이고 나머지는 언덕 아래에 있다. 언영이 굴 입구에서 보이는 대로 화살을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자빠지며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마치 조개와 황새들 싸움같이 서로 대치하는 동안 벌써 한나절을 넘겼다. 상·하굴 사람들은 거의 포로가 되었고 남은 것은 나와 강녀 아들 주 그리고 언영과 관노 언이 등 몇 명뿐이다.

왜 한 명이 몸을 던져 돌입하여 언영이의 옷소매를 잡아 묶으매 나는 두 손에 창을 들어오는 왜를 찌르러 할 찰나 적의 칼은 먼저 나에게 내려온다. 순간에 강녀가 나의 등에 엎드려 “나를 죽일지언정 나의 남편은 아니 된다”하니 주는 나를 껴안고 통곡한다. 

굴 안이 좁아서 칼이 벽에 부딪치고 나에게는 닿지 않았다. 내가 몸을 일으켜 서려할 때에 칼이 내 팔에 맞아 피가 물같이 흐른다. 적은 나를 먼저 묶고 강녀를 잡으니 평상시의 안색과 말투로 “내가 어디 가리오”하며 나를 따라 굴을 내려오다가 왜병이 손을 잡으려 하니 장차 왜병에게 욕볼 것을 미리 짐작하고 사다리에서 천인절벽에 떨어지니 왜장도 탄식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관노 언이, 임손과 지대성은 오는 중에 도망쳤다. 군청으로 이동 후 심문을 하고 양팔과 몸을 결박하여 굽혔다 펼 수도 없고 근처에서는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이 일기를 보면 권두문의 첩인 강녀의 정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동굴에 숨은 지아비가 왜군의 칼에 맞을 위기에 있자 몸으로 막아서고 남편을 죽게 할 수 없다고 울부짖은 강녀. 그녀는 권두문이 체포되어 끌려가는 순간 노산성 높은 절벽에서 몸을 날려 평창강에 투신했다. 

왜군에게 몸이 더렵혀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강녀의 순절은 조선 여인의 서릿발 같은 정절을 보여준 것이다. 임진전쟁 당시 부군과 함께 죽은 동래부사 송상현의 애첩 김섬(金蟾), 왜장을 껴안고 죽은 진주성의 논개, 의병을 도운 평양기생 계월향의 의로움에 버금가는 얘기다. 뒤늦게나마 그녀의 절의를 기리는 표석이라도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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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권두문 평창군수와 선조들은 이 고장을 지키기 위해 왜군과 맞서 피 흘려 싸웠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평창 노산성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고구려 학술행사 강녀 진혼 행사 없어

평창군에서는 매년 가을 노산성(魯山城)에서 노성제를 지낸다. 성안 성황당에서 군민의 안녕과 의병들의 넋을 비는 성황제를 지내다가 1982년 임진노성전적비를 세우고 10월 7일을 군민의 날로 제정하여 문화축전을 베풀고 있다.

행사는 다양하게 꾸며져 있다. 노성전투재현, 민속경연, 군민 노래자랑, 야시장, 줄다리기·팔씨름 등의 읍면대항 민속경기를 비롯해 한시 백일장, 전국시조경창대회, 사군자전, 서예전 등 문화행사도 있다. 그 외 평창군 먹거리 장터와 지역에서 만드는 특산품 전시회도 열린다.

아쉬운 것은 노산성의 고대 역사인 고구려, 신라에 대한 학술행사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노성제라면 이 성을 두고 치열하게 전쟁했던 고대사를 복원하기 위한 전문가들의 토론회도 필요하다. 고구려 욱오산성(郁烏山城) 유적이라는 것을 규명하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왜군에게 몸이 더렵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평창강에 투신한 권두문 군수의 애첩 강녀의 순절을 기리는 진혼 행사도 마련했으면 한다. 나중에 시신도 건지지 못했을 터이니 500년 차디찬 평창 강물에서 맴도는 원혼이 얼마나 외롭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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