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정선군 고성산성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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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산성에서 바라본 전경(왼쪽이 영월 가운데가 평창 오른쪽이 정선)

프롤로그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에는 외로운 처녀상이 하나 서있다. 처녀는 강 건너편에 있는 총각상을 애타는 얼굴로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처녀는 왜 이런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일까. ‘정선 아리랑’ 가사에 처녀의 애끓는 마음을 담은 내용이 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나는 못 살겠네

처녀는 강 건너에 사는 총각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둘은 동백을 따러 가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와 물이 넘치는 바람에 처녀는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님을 지척에 두고 처녀는 슬픔에 젖어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정선 아우라지. 왜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일까. ‘아우라지’라는 명칭은 순수한 우리말로 두 개의 물이 합쳐진 지역을 말한다. 정선아라리는 늘어지는 ‘긴 아라리’를 가리킨다. 민족의 한과 아픔을 노래한 대표격 민요다. 노랫말 속에는 남녀의 사랑, 연정, 이별, 신세 한탄 또는 세태풍자 등 솔직하고 해학적인 민초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노랫말은 700~800여 수나 된다고 하니 장대한 서사시라 할 수 있다. 노래 중에 정선에 있는 지명이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그중 많이 불리는 가사를 간추려 보았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 모춘삼월(暮春三月)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 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나는 못 살겠네

부모동기 이별할 때는 눈물이 짤금 나더니 / 그대 당신을 이별하자니 하늘이 팽팽 돈다네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 우리 집에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 몰라

(중략)

총각낭군이 좋다고 하더니 좋기는 좋다 / 삼년묵은 냉방에도 진땀이 나네

창밖은 삼경인데 보슬비가 오고요 / 우리 둘에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

새 정분이 날이 밝아서 흡족지 않아요 / 옷소매를 움켜쥐고서 다시 올 날 또 묻네

비봉산 중허리에 두견새가 울거든 / 가신님의 영혼이 돌아온 줄 알아라

높은 산 정상 말랑에 단독이나 선 나무 / 날과도 같이로만 외로이도 섰네

니 칠자나 네 팔자나 이불 담요 깔겠나 / 멍틀멍틀 장석자리에 깊은 정 들자

창밖에 오는 비는 구성지게 오잖나 / 비 끝에 돋는 달은 유정도하다

시어머니 죽어지니 안방 넓어 좋더니 / 보리방아 물줬더니 시어머니 생각이 나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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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아우라지 처녀상

고구려 땅 ‘잉매현’

정선은 고구려 때 잉매현(仍買縣)이라고 불렸다. ‘잉매’란 무슨 뜻일까. 언어학자들은 ‘매(買)’를 米 - 川, 買, 井 - 川으로 해석했다. 買는 또 사다, 즉 꼭 필요한 것을 지칭한 것이라고 한다. 고(故) 이병도 박사는 <동국여지승람> 권15 ‘청주속현’조에 나오는 ‘살매현(薩買縣)’의 ‘매’를 ‘수(水)’로 해석했다. 즉 고구려 신라가 금강 상류를 두고 쟁패하는 6세기 중반 살수원 전투지를 충북 괴산군 청천면 유역으로 비정한 것이다.

‘청천현, 재주동육십리, 고살매현, 일운청천(靑川縣, 在州東六十里, 古薩買縣, 一云靑川)’이라 하였으니 매(買)는 고어(古語) 수(水)의 뜻인 ‘매’의 사음(寫音)이므로 여기에 살수원(薩水原)은 즉 이곳을 가리킨 것이다.

경기도 수원시도 고구려 시대에 ‘매홀(買忽)’로 불렸는데 ‘水(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국사기> 권25 잡지4 지리2에 ‘수성군 본고구려 매홀군 경덕왕 개명 금 수주(水城郡 本高句麗 買忽郡 景德王 改名 今 水州)’라 기록되어 있다. 매홀의 ‘매’는 ‘물’을, ‘홀’은 ‘고을’을 나타내는 말로 ‘매홀’은 ‘물 고을’이라는 발음의 표기로 추정하는 것이다.

신라 때는 정선(旌善), 고려 때 삼봉(三鳳), 도원(桃原), 심봉(沈鳳) 등 여러 명칭이 있다. 757(신라 경덕왕 16)년에 정선현으로 개칭되어 명주(溟洲) 영현(領縣)으로 편입되었다. 

‘정선’은 이 지역 사람들이 효제의 도를 숭상하고, 생업에 근면하며, 선미(善美)함을 찬양하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신라 때부터 효행의 고장으로 불린 것인가. 

고려 현종 3(1012)년에 정선군으로 승격되었다. 1018년에는 명주에 속하는 주진군(朱陳郡)으로 개칭되었다. 1353(공민왕 3)년에 다시 정선군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삼봉(三鳳), 심봉(沈峰), 도원(桃源), 주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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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캠핑장에서 바라본 고성산성(왼쪽)

고구려 ‘고성산성’을 찾아

고성산성(古城山城. 강원도기념물 제68호)은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산319에 위치하고 있다. 글마루 답사반과 한국역사문화연구회는 2021년 4월 초 이 성을 답사했다. 한눈에 단양 온달산성과 너무 비슷한 모양새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내, 외면을 들여쌓기로 석축했다. 만주 일대에 많이 축조되어 있는 고구려 산성을 옮겨온 듯하다.

이 성은 <신증 동국여지승람> 권제 46 고적 조에 기록되어 있다.

‘고성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7백 82척 높이가 8척이다. 안에 성황사가 있는데 지금은 반은 퇴락하였다(古城. 在郡東五里石築周七百八十二尺 高八尺 內有城隍祠今半頹落).’

<정선군지>에 나와 있는 고성을 노래 한 시가 있다. 

이름 없는 옛 성 신라의 성인가 고구려의 성인가 / 성벽은 높고 웅장한데 / 석축만이 오랜 역사 간직했네 / 천봉만학(千峯萬壑) 둘렀고 장강이 에웠으니 / 일부당관의 요새지에 난공불락의 철벽성일세 / 영남 길 구레기 고개 하늘 높이 솟았고 / 관북 가는 뱃나루 남한강이 창일하네 / 반도를 경영하는 자 먼저 한수를 차지하여야 하네 / 활 쏘고 창 쓰던 그날이 언제던가 / 한낮의 닭 울음소리만이 평화롭기만 하네.

성에서 내려다보면 굽이굽이 아우라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우라지를 방어한 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남쪽에서 북상하는 신라 세력을 방어한 기능이 역력하다. 그런데 이 성을 고구려성으로 보는 학계의 시선은 조금 인색한 편이다. 대개는 신라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성은 <조선고적조사> 자료에 높이 5.4m, 둘레 630m, 성곽은 석축과 판축성으로 구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부분이 판축성으로 구축되었으며 서편 석축 안쪽에는 이중성으로 보이는 교란된 석축이 보이고 있다. 성의 형태는 해발 425m의 산 정상에 테를 두른 듯 둥글게 공간을 두고 주변의 길목에서 잘 보이는 곳에 네 군데(제1산성~제4산성)로 나누어 축성하였다. 

성과 성의 넓은 거리를 문지(門址)로 보기에는 너무 넓다. 왜 이런 축조를 한 것일까. 중국 서풍현 성자산 산성(西豊縣 城子山 山城) 등 여러 고구려 성지도 비슷하지만 문지가 이처럼 넓지는 않다. 

성의 규모는 단양군 영춘면 온달성처럼 크지 않으나 견고한 철옹성으로 축조하였다. 북편의 석축이 가장 높고 본래의 모습이 잘 남아있다. 영월 정양산성과 비슷한 축조다. 성 상면은 군마가 다닐 수 있도록 견고한 돌로 협축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서쪽 부분 석축 상면에 고대 전쟁에서 성을 공격하거나 방어할 때 사용했던 포석군(砲石群)이 군데군데 무더기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포차에 실어 공격해 오는 적군을 향해 포석을 날렸을 경우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근년에 성을 보수하면서 옮겨다 놓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무더기가 너무 정연하다. 

정선군에서는 1997년부터 국고지원을 받아 다섯 번에 걸쳐 고성산성을 발굴조사 했다. 보고서를 보면 신라의 축성술에 가깝다고 해석했다. 과연 옳은 판단일까. 석축의 방법이나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수법은 온달산성 정양산성과 너무나 흡사하다. 

특히 서북쪽 성벽 안쪽에는 계단식으로 쌓아 고구려 축성의 일반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성벽 바깥면도 경사지로서 붕괴 방지를 위해 계단식 성벽을 쌓기도 했다. 남쪽에 있는 치성(雉城)도 길이 12m, 하단넓이 9m, 상단은 4m에 이른다. 

성안에서 가장 높은 서쪽에는 둥근 구덩이와 네모난 석축 시설이 있는데, 쌓은 형태로 볼 때 봉수대로 추정된다. 마을사람들은 맞은 편에 위치한 칠목령 산성의 봉수와 횃불을 주고받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고 했다.

주목되는 것은 성안에서 청동기시대의 마제석검과 석촉, 무문토기가 다수 발견된 점이다. 단양 온달설 안에서도 청동기 후기의 조질 적색 토기가 산견되고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성안에는 다수의 건물지로 보이는 대지가 여러 군데나 있다. 성안을 정비하기 전에는 화전민들이 살았다고 하며 군데군데 민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적색무문토기나 다수의 삼국시대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으나 적색와편은 찾지 못했다. 건물지를 발굴하면 다수의 적색와편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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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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