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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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복(微服) 잠행’이란 임금이 평민 의상을 입고 바깥세상을 시찰하는 것을 지칭한 말이다. 구중궁궐에 갇혀 살던 임금들도 때로는 자유롭게 거리를 구경하고 백성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고구려 산상왕의 부인은 미망인인 형수였다. 형수의 도움으로 왕위를 얻은 산상왕은 그녀의 질투심으로 다른 왕비를 얻지 못했다. 왕은 어느 날 제사에 쓸 돼지가 궁을 빠져나가자 이를 뒤쫓았는데 주통촌에 다다른다. 주통촌은 색주가로 술과 여자가 있는 곳이었다.

산상왕은 궁중을 빠져나가 여자를 만나고 싶었던 것인가. 그는 주통촌에서 한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여자가 임신하자 궁 안으로 데리고 와 왕자를 얻는다. 산상왕의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제11대 동천왕(東川王)이다.

조선왕조시대에 세조, 성종, 숙종 임금에겐 미복 일화가 많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지금의 운현궁 근방에 살아 한양의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알았는데 임금이 되고서도 미복으로 도성 안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술을 좋아한 성종은 명기 소춘풍을 만나러 궁 밖 뒷골목으로 나갔다. 소춘풍에게는 전하, 임금님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게 하고 범부를 부르듯 ‘이서방’이라고 호칭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성종은 소춘풍을 만나기 위해 여악(女樂)을 궁중에 들이기까지 했는데 그만 중전 윤비의 노여움을 사 부부싸움까지 하는 촌극을 벌였다. 이 부부싸움이 나중에 윤비의 폐비로 이어지고 그 아들 연산군이 중신들을 도륙하는 갑자사화의 단초가 됐다.

숙종의 미복일화는 과거에 오르지 못하는 숨은 선비를 등용했다는 미담으로 엮어진다. 남산골을 지나다 밤늦게 불이 켜진 오두막집을 방문하고 대대로 세습되는 과거제도의 모순을 파악하게 된다. 궁으로 돌아온 숙종은 직접 과거를 주재하고 숨어있던 인재를 발굴했다.

과거 고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도 미복 잠행이 있었다는 일화가 전하지만 요즈음은 대통령의 얼굴을 모르는 국민이 없어 불가능하다. 뒷골목 술집에 가서 친구들과 망중한을 즐길 수도 없다.

서울 청담동 술집에서 윤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장관이 심야에 광란 파티가 있었다는 한 유튜브 보도가 이태원 참사에 가리는 듯하다가 다시 점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최근에는 유튜버가 언론을 통해 카페를 확인했다는 식의 기자회견을 했다. 다시 의혹을 부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저명 음악인이 문제의 첼리스트 유튜브 연주 영상을 보고 ‘핸드 싱크(hand sync)’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A씨가 연주에 맞춰 손동작만 했다는 것이다. 즉 유명 첼리스트의 연주 파일을 틀어 놓고 A씨는 연주하는 척하는 영상만 입힌 것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이 같은 의혹이 제기되자 그 첼리스트는 같은 날 오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모든 연주 영상을 내렸다. 그녀가 남자친구에게 했다는 대통령의 청담동 술집 파티는 허언이란 심증이 굳어지고 있다.

경찰은 첼리스트를 소환 통보하고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첼리스트는 아직 소환에 불응하고 있다. 떳떳하다면 왜 소환에 응하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도 야당은 제 식구 감싸기, 의혹 부풀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청담동 미복 잠행 술파티는 아무래도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것 같다. 면책특권을 믿고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가 판을 치는 정치 풍토는 사라져야 한다.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국민들이 믿지 않는다면 그 정치인은 생명력을 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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