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왕릉 ‘정릉’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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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준 SG전략연구원장, 왕릉답사가

왕릉에 간다. 하루하루 치열한 삶에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싶을 때 찾는다. 그곳은 일상의 휴식처이자 역사의 교육장이다. 왕릉은 ‘신들의 정원(the garden of the gods)’이라 부른다.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에 들어서면 산자의 땅에서 혼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왕과 왕비가 되살아 나와 혼유석에서 노닌다. 그들과 조우라도 하면 힘겨운 인생사는 물론 세상사도 툭 터놓고 논하며 위로를 받는다. 흉금을 보여도 여린 미소로 받아주며 왕 자신도 엄하고 혹독한 삶에서 얻은 노하우를 전해주니 최고의 인생 학교가 아닌가 싶다. 비록 우리가 생존경쟁, 갈등과 다툼, 스트레스에 허덕여도 감히 왕과 왕비의 처절하고 냉혹했던 현실에 비할 수나 있을까. 승리한 제왕으로, 때로는 무너진 미완의 군주로 그친 27명의 왕, 41명의 왕비와 마주했다. 6년간 유네스코 조선왕릉을 다니며 그들의 처세와 경영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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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정자각’ 제향을 지내는 곳으로 위에서 보면 ‘정(丁)’자형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2.11.08

◆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정릉은 조선 최초의 왕릉이다.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자 조선의 첫 왕비가 된 신덕고황후 강씨(신덕왕후)의 무덤이다. 원래는 서울 중구 정동 현 영국대사관 근처에 있었으나 1409년 태종 이방원에 의해 파헤쳐지고 현재의 성북구 정릉 자리에 천장했다. 왕릉에서 묘로 팽개쳐진 것이다. 그리고 무려 260년이 지나 1669년 현종 때에 현재 모습으로 안착됐다. 화려한 왕비의 무덤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릉(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42기의 조선왕릉이 분포돼 있다. 북한에 있는 2기의 왕릉을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화양연화, 사랑과 부귀영화 움켜잡다

정릉역에서 도보로 10여 분 언덕배기를 오르면 닿는 곳이 정릉이다. 매표소를 지나 눈앞 실개천 위로 소박한 돌다리 하나가 놓여있다. 금천교(禁川橋)다. 왕릉의 입구에 흐르는 개울 금천에 놓여있으며, 신성하고 존엄한 영역으로 진입하는 다리를 뜻한다. 금천교를 건너 이내 붉은색 단풍과 어울려 크게 자리 잡은 건축물이 바로 정자각이다. 정자각과 봉분이 두 눈에 들어오면서 주변의 아름다운 단풍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42개의 조선왕릉, 아니 백제나 신라의 왕릉을 총망라해서 정릉처럼 아늑하고 짜임새 있는 정원은 보기 힘들다. 이곳이 조선의 첫 왕비이자 조선왕실 최초 왕릉의 주인공으로 ‘최초’ 타이틀을 두 개나 차지한 여인, 신덕고황후 강씨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이제부터 강씨의 이야기를 풀어보자. 강씨는 태조의 경처(도시에 있는 아내)이다. 태조는 고향에 향처(고향에 있는 아내) 한씨가 있었다. 한씨는 6남 2녀를 낳았는데 왕이 된 정종과 태종 등 8남매의 어머니로서 가정을 보살피는 역할을 했다. 1391년 태조가 즉위하기 1년 전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반면 강씨는 고려 권문세가의 딸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상산부원군(정2품의 문하찬성사를 지냄) 강윤성의 딸이다. 그녀의 작은 아버지 강윤충과 사촌오빠 상장군 강우는 이성계의 사촌 매형(큰아버지의 사위)으로 양쪽이 사돈을 맺고 있었다. 강씨는 이성계가 큰 벼슬의 가문 출신이 아니지만, 신흥 무인 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에 양가에 의해 정략결혼을 했다. 그리고 이성계가 권력 형성과 조선 왕이 되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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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의 장명등(長明燈)’, 원래 모습의 가장 오래된 조선왕릉 석물이다. 바로 뒤에 봉분(封墳)과 좌우 두 개의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봉분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 만든 무덤, 장명등은 어두운 사후세계를 밝힌다는 뜻의 석등이다. 망주석은 멀리서도 볼 수 있게 좌우에 세우는 돌기둥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2.11.08

◆사랑스러운 경처, 마침내 왕비 되다

강씨는 태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태조 이성계와 강씨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이성계가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의 아리따운 처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건네줬다. 이성계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처자는 “갈증이 심하시어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하실까 염려되어 그랬습니다”라 했다. 이에 이성계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와 지혜로움에 반해 부인으로 맞게 됐다. 이 이야기가 말해주듯 태조의 강씨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매우 컸다. 

천하대장군 이성계와 결혼한 강씨는 2남 1녀를 뒀다. 1381년에 방번, 다음해에 방석, 이어 딸 경선공주를 낳았다. 그리고 1392년 7월 17일 태조가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자 왕비가 됐다. 왕비는 껄끄러울 수 있는 의붓아들들(태조의 전처소생)과도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다. 왕비는 10살 아래 아들인 방원과 우호적이었다. 하루는 태조가 말에서 떨어져 다쳤을 때 정몽주 일파가 그를 해치려 했다. 이를 안 강씨는 방원에게 알려 아버지를 구하도록 했고, 방원이 정몽주를 죽여 태조의 노여움을 샀을 때도 방원의 편을 들어 무마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단단한 가문을 배경으로 37세에 조선 최초의 왕비에 올라 세상은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졌고 최고의 출세와 행복을 움켜쥔 여성이 됐다. 젊은 왕비는 거칠 것도 세상 부러운 것도 없었다. 나아가서 어린 아들이 왕세자가 되면 다음 왕의 자리까지 맡게 되므로 그야말로 비단길이자 꽃길만이 펼쳐지게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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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다. 불타 없어졌으나 1794년 정조 때 현 위치에 다시 지었다. 좌측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2.11.08

◆아들을 왕세자로, 과유불급이었나

태조는 차기 국왕인 왕세자로 강씨의 둘째 아들인 11살짜리 방석을 세웠다. 왕과 왕비의 아들이니 왕세자로 삼을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적장자도 아니고 나이도 어린 왕자를 선택하는 것이 과연 무난한 왕위승계의 수순이었을까.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이자 실세인 정도전과 신덕왕후의 의도대로 된 것이다. 어린 왕세자의 책봉은 태조를 도와 전장을 누비며 활약한 방과, 방간, 방원 등 한씨의 아들들을 자극했다. 1392년 강씨가 왕비가 되면서 첫 번째 부인 한씨는 1년 후에 추존 왕비가 됐다.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자신의 생모가 늦게 추존왕비가 되자 울분을 느꼈다. 특히 5남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운 공로가 크고 자질이 뛰어난 인물로 이러한 상황에 불만이 컸다. 또한 왕세자 이방석을 끼고 도는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권력 장악을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건강이 안 좋던 신덕왕후 강씨는 1396(태조 5)년 8월 9일 이득분의 사저로 옮겨졌다. 그리고 나흘 후 왕비가 된 후 4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태조는 충격과 슬픔에 잠겼다.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10일간 시장의 문을 열지 않았다. 태조는 그녀를 왕후로 추봉했다. 태조는 오직 신덕왕후만을 생각했다. 그는 궁궐에서 바라보이는 취현방(현 덕수궁 뒤편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가장 호화스러운 능역을 조성했다. 강씨 봉분 우측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마련했고 능호는 정릉(貞陵)으로 했다. 신덕왕후는 조선 최초의 왕실 장례를 성대하게 치뤄진 후 능에 묻혔다. 태조는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릉 동쪽에 170여 칸에 이르는 원찰 흥천사를 세웠다. 태조는 의욕을 잃고 왕후만을 생각하며 흥천사의 종소리에 비로소 잠을 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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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광통교’ 정릉의 석물을 가져다 지었다. 병풍석이 벽면에 거꾸로 붙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2.11.08

◆조선의 ‘이카로스’가 된 왕비 

신덕왕후가 세상을 뜨고 얼마 안 돼 큰일이 벌어졌다. 정도전, 남은 등 공신(功臣)들은 왕실의 권력기반인 사병을 혁파하려 했다. 방원은 이를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1398(무인년)년 8월 25일 형제들과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남은 등의 세력과 이복동생이자 왕세자인 방석, 그의 형 방번을 살해했다(제1차 왕자의 난). 태조는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왕위를 둘째 방과(제2대 정종, 定宗)에게 내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그러나 2년 후 공신 책봉에 불만이 있던 박포가 넷째 왕자 방간을 충동질해 방원과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방원이 승리했다(제2차 왕자의 난). 이어 방원이 1400(정종 2)년 11월 왕(태종, 太宗)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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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광통교’ 정릉의 석물을 가져다 지었다. 병풍석이 벽면에 거꾸로 붙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2.11.08

그리고 8년 후 태조가 승하했다. 그러자 왕후의 자식들과 주변 인물에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태종은 1408년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에 대한 보복과 자신의 어머니 한씨의 추승에 들어갔다.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켰다. 또한 의정부에서 “정릉이 도성 안에 있음에 영역이 너무 넓으니, 능에서 1백 보 밖에 집을 짓게 하소서”하니 허락했다. 세도가들이 정릉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도록 했다. 아예 능은 묘로 격하시켜 도성 밖 양주시 성북면 현 정릉 자리로 이장했다. 태종 10(1410)년에 청계천에 큰비가 내려 광통교가 유실되자 정릉 터의 병풍석 등 석물을 가져다 돌다리를 만들었다. 정자각도 없애버렸다. 

신덕왕후는 살아서 누리던 모든 부귀영화는 거품처럼 사라지고 사후에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정릉 둘레의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 금천교를 건너며 문득 이카로스(Icarus)가 생각났다. 아! 신덕왕후는 결국 조선의 이카로스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는 자신이 새처럼 날게 되자 하늘 높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너무 높이 날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말을 잊고 하늘 높이 날면서 자신감에 도취됐다. 그러나 태양 가까이 다가가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오르자 그의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아 버렸다. 그는 에게해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카로스의 날개’라는 말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과 절제하지 못하는 과욕을 상징한다. 위험을 간과하고 끝없이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일화이다.

누구에게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절이 있기 마련이지만 세월은 인정사정이 없나 보다. 한때 권력이나 명예, 부를 얻은 사람도 해가 바뀌면 기울고 스러진다. 더 얻고 더 나가려 발버둥 치다가 이룬 것도 못 지키고 종말에 이르는 이도 있다. 

왕후 강씨도 모든 것을 다 가지려다 죽음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어찌 조선의 이카로스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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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정릉은 어느 왕릉보다 단풍이 아름다운 정원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2.11.08

◆세원우, 금천 따라 세월 속으로 

정릉의 가을도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저물어 간다. 정릉의 사계절은 마치 신덕왕후의 삶처럼 형형색색 변했다. 그녀의 봄은 아름답고 지혜로운 젊은 처자의 모습처럼 생기 넘치게 피어났다. 여름은 꽃과 녹음방초처럼 온 누리에 화사하고 무성하게 퍼지며 세상 더할 게 없는 장군 부인으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가을은 단풍처럼 원숙함과 품위가 돋보이던 왕비의 시간이었다. 한여름 열기 못지않게 들불과 같이 붉게 물든 단풍처럼 말이다. 그러나 늦가을 지나 꽃은 떨어지고 빛도 바래지더니 낙엽이 뒹굴기 시작했다. 이내 겨울의 차디찬 냉기와 어둠이 금천교 건너 정자각으로 드리워진다.

정릉을 처음 찾은 늦가을 큰비가 내렸다. 정릉에 내리는 비는 그저 그런 가을비가 아니다. 신덕왕후가 세상을 뜬 지 260년이 지나 현종이 신덕왕후에게 휘호를 올리고 부묘(신주를 사당으로 옮김)해 폐비가 된 강씨의 지위를 회복시켰다. 이때 하늘에서 비가 내려 그녀의 원통함을 씻어 내렸다 하니 이 비를 세원지우(洗冤之雨)라 한 것이다. 그로부터 600년이 지났다. 왕후의 한이 씻어 내리기는 했을까. 정릉은 1669(현종 10)년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1899(광무3)년에는 태조가 황제로 추존됐으므로 왕후도 신덕고황후로 추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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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의 금천교(禁川橋)’ 정릉의 금천교는 어느 왕릉의 금천교보다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2.11.08

신덕왕후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금천교를 건너 다시 속세로 돌아온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 이승이나 저승이나 쉽지 않은가 보다. 홀로 있는 왕후와 그토록 사랑해주던 태조는 저승에 가서 오히려 더 멀리 떨어지고 말았다. 과연 신덕왕후의 과욕이었을까 아니면 이방원의 횡포였을까. 오늘날 어머니들이 만일 신덕왕후였다면 과연 어떻게 처신했을까. 한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좌우한다. 출세와 돈 앞에서 더욱 안전하게 사는 방법은 외면받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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