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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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이다.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가족과 씨족을 이루고 사회를 만들고, 국가를 형성했다. 무리를 지어 살다 보니 유희와 여가도 필요했다. 네덜란드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하(1872~1945)가 유희하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칭한 이유이다. 

군중은 유희적 본성을 찾기 위해 한 곳에 모인 많은 사람을 뜻한다. 공통된 규범이나 조직성 없이 우연히 조직된 인간의 일시적 집합이다.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된 많은 이들은 핼러윈 축제를 위해 모인 군중들이었다. 

198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엘리아스 카네티(1905~1994)가 35년간 군중현상을 연구해 내놓은 결과물인 ‘군중과 권력’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르는 것에 의한 접촉보다 인간이 더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 접촉에 대한 혐오감은 우리가 사람들 사이를 걸어갈 때도 사라지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 사이에서, 음식점에서, 기차나 버스에서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방식은 이 두려움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 곁에 아주 가까이 서서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고 자세히 관찰할 수 있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려 한다.”

이러한 ‘접촉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밀집된 군중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나와 구분되지 않는 타자와 접촉함으로써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이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군중 속에 놓이는 순간 인간은 닿는 게 두렵지 않게 된다. 이상적인 경우에 거기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어떠한 구별도 없으며 성별 차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민 자가 곧 밀린 자요, 밀린 자가 곧 민 자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갑자기 모두가 한몸이 돼 행동하는 것 같아진다. 군중이 서로 밀착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원초적인 ‘접촉 공포’를 떨쳐버리기 위해  군중을 형성하며, 군중이 무한 증식을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라는 것이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이태원에 운집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카네티가 말한 ‘순한 양떼’와 같은 군중들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닫혀있던 청춘들이 3년 만에 되찾은 거리로 뛰쳐나와 글로벌 대중문화의 하나인 핼러윈 축제에 참가한 것이다. 

이태원 참사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스포츠 경기가 실내외에서 활발히 열리고 있다. 프로야구는 올 최종 챔피언을 가리는 한국시리즈가 SSG샌더스와 키움 히어로즈 두 팀의 경기가 열리며, 겨울철 종목인 프로배구와 프로농구가 본격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1년 만에 국내 코트로 복귀한 여자배구는 세계적인 스타인 흥국생명의 김연경을 보기 위해 연일 만원 사례를 보일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스포츠 관중들은 매우 흥미로운 군중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동시에 흥분을 느낀다. 이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공통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한다.

현대스포츠의 스펙터클은 이런 관중의 속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난 10월 125명의 사망자를 낳은 인도네시아 축구장 난동 사고, 1989년 영국 축구 FA컵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 경기가 열린 힐스버러 경기장에 관중이 몰리며 96명이 압사한 사고, 1964년 페루 리마에서 페루와 아르헨티나 경기 중 관중 난입으로 320명이 압사한 사건 등 관중이 예기치 않게 희생된 일들이 있었다. 

인간의 본능에 의해 평등과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밀집하는 군중이나 관중이지만 모임의 자리나 특성을 잘 살펴보고 적절한 공간을 유지하며 개인들이 이성과 감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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