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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세종(世宗) 대에 천문학(天文學)이 발전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기여를 한 장영실(蔣英實)의 생애를 소개한다.

장영실은 천민 출신(賤民出身)으로 언제 출생했는지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 동래현에서 관노 생활(官奴生活)을 하던 중에 세종 대에 발탁됐다. 구체적으로 세종은 과학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인재들을 찾고 있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관노 출신인 장영실이 발탁되었으니 당시로선 파격적인 조치라 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인재를 중시한 세종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세종에 의하여 발탁된 장영실은 중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그곳에서 천문기기(天文機器)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귀국하여 본격적인 천문학자(天文學者)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특히 1423(세종 5)년 그의 삶의 굴레라 할 수 있는 관노의 신분에서 면천(免賤) 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세종은 장영실을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로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그 후 다시 의논하여 마침내 상의원 별좌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때부터 장영실은 궁중 기술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으니 과거에 노비라고 손가락질 받던 입장에서 볼 때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하기에 그는 임금의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더 열심히 연구하고 자는 시간도 줄이면서 열심히 일했다. 1432(세종 14)년 장영실은 이천(李蕆)을 도와 간의(簡儀)를 완성했으며 이듬해인 1433(세종 15)년 정초(鄭招), 박연(朴煙) 등과 함께 천체를 관측할 때 쓰는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다.

이와 관련해 혼천의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로서 중국 우주관중의 하나인 혼천설(渾天說)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러한 혼천설의 핵심 포인트는 우주는 새알처럼 둥글게 이 땅을 둘러싸고 있는데 땅은 마치 새알 껍질 같은 우주 속에 있는 노른자위처럼 생겼다는 학설이었다.

한편 세종은 경복궁(景福宮) 경회루(慶會樓) 북쪽에 간의대(簡儀臺)라는 천문 관측대(天文觀測臺)를 세워 장영실이 만든 기구를 설치하고 실제로 측정에 사용하였다. 그래서 장영실이 만든 관측기(觀測器)를 이용하여 한성(漢城)의 위치가 북위 38도라는 것을 알아냈으며 더 나아가서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의 높이를 알게 됐다. 또 북극성(北極星)과의 거리도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수치가 오늘날의 과학 기구로 잰 것과 거의 비슷할 정도라고 하니 그때 만든 관측기가 정밀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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