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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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지난주까지만 해도 일본에 대한 ‘굴욕 외교’가 여론의 큰 이슈였다. 그동안 박진 외교부 장관이 한일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저자세’ 모습을 보인다는 지적이 많았다. 특히 우리 대법원이 판결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과 관련해 일본 기업이나 일본 정부가 아니라 왜 우리 정부가 그 해법을 찾아야 하느냐는 비판이었다. 가해국인 일본은 외면하고 있는데 피해국인 한국 정부가 그 해법을 찾는 게 말이 되느냐는 얘기다. 심지어 시큰둥한 일본 정부를 달래가며 우리 정부가 한일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강제징용 해법을 놓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행태 자체가 굴욕적이라는 쓴소리가 쏟아졌다. 급기야 지난달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가 만났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일 유엔 총회장 인근의 한 콘퍼런스 빌딩으로 직접 기시다 총리를 찾아가서 만났지만 그 결과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통령실은 첫 ‘약식 한일정상회담’이라고 설명하면서 상호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간담(懇談)’을 나눴다는 정도에 그쳤다. 심지어 직전까지만 해도 기시다 총리는 한국 정부의 일방적 발표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만나지 않겠다’는 극언까지 나왔다. 따라서 내키지 않지만 ‘간담’을 나눠줬다는 일본의 오만함과 약식이지만 어렵게라도 ‘한일정상회담’이 성사돼서 기쁘다는 한국의 안도감이 교차하는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박진 장관이 동분서주하며 찾아 나선 일제 강제징용 배상금 해법은 어떻게 됐을까. ‘약식 한일정상회담’ 이후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서도 특별한 얘기가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그러다가 일본 교도통신이 지난 23일 첫 보도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할 일본 기업이 아니라, 한국의 ‘재단(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대신 지급한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금은 한국 측에서 재단에 기부금을 내고, 재단이 그 돈으로 일본 기업을 대신해서 배상금을 지급토록 한다는 얘기다.

피해국인 한국 또는 한국 기업이 재단에 기부금을 지원해서 그 돈으로 한국의 강제징용 노동자들에게 배상토록 한다는 것은 굴욕적이긴 마찬가지다. 그마저도 일본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며, 우리 대법원 판결과는 전혀 다른 결론이다. 이런 식이라면 일본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런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렇다면 재단에 기부금을 지원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우리 정부 아니면 대기업이다. 어느 쪽이든 국민의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 정부가 나서면 강제징용을 한 일본 전범 기업을 혈세로 지원했다는 비난 여론이 폭발할 것이다. 기업이 나서면 일본 전범 기업이 내야 할 돈을 왜 우리 대기업이 대신 내느냐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굴욕과 자괴감은 쉬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국내 여론이 워낙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꿈쩍도 않는 일본 정부와는 달리 오히려 우리 정부가 더 바쁘게 움직이는 것부터가 한 수 접고 가는 셈이다. 그래서 ‘굴욕 외교’ 등의 얘기가 나오는 것이며, 박진 외교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도 이런 배경이다. 핵심은 국내 여론이, 그리고 일제 강제징용 피해를 당한 노동자들이 정부의 이런 해법에 과연 동의해 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재단이 대납할 때 일본 기업들도 지원금 등의 형식으로 일정한 부담을 할 것이다. 관건은 돈을 주고받는 방식이나 그 액수에 있지 않다. 그 돈의 성격이 무엇이냐는 것이 핵심이라는 뜻이다. 지원금이냐, 배상금이냐는 것은 성격부터 전혀 다르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지난 26일 보도한 내용도 당초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 대신 배상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여론의 반발이 예상돼 재단의 기부금으로 대신 배상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의 여론을 감안해 일제 강제징용 주체인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도 일정한 부담이 필요하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이 전달됐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돈의 성격도 배상금이 아니라 ‘기부금’으로 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나 일본 기업 입장에서는 사과할 필요도, 배상할 이유도 없다는 기존 입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니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우리 쪽이다. 방향이 이렇게 잡힌다면 대법원의 판결은 한 편의 코미디가 되고 말 것이다. 일본 기업의 배상금은커녕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재단에 기부금을 모아주고 그 돈으로 대신 지원해 주는 편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식민지 배상 문제는 끝났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기업은 강제징용 문제에 통 큰 기부를 했다는 식의 시혜자 행보를 보일 것이다. 이래저래 일본은 가해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더 당당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한일정상회담을 서두른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궁금하다. 미국을 의식했다면 오판이다. 일본의 선의를 기대했다면 순진했다. 피해국 대한민국의 국민, 피해자 징용 노동자들의 명예와 자존심은 이미 큰 상처를 받았다. 재단에 ‘시혜’ 운운하며 지원금 얼마로 더 당당한 태도를 보일 일본 전범 기업의 오만함을 우리가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가 더 걱정이다. 그리고 식민지 역사에 대한 당당한 피해 배상 목소리보다 좌고우면하며 낮게 임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또 한 번의 아픔이다. 연말까지는 한일정상회담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그즈음 강제징용 해법도 결론을 볼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기대치는 어려워 보인다. 핵심은 우리 국민의 여론이다. 다시 비판과 분노가 일어날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무관심하게 흘러갈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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