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image

몇 년 전 봄에 벗들과 산동을 찾았다. 마침 한식을 맞아 아성(亞聖) 맹자의 묘에 봉토작업을 하고 공묘와 태산을 거쳐 제남에서 산동대학과 이청조사당과 천불산을 둘러봤다. 임치로 이동해 제경공의 순마갱, 관중과 안영의 묘, 공자문소처(孔子聞韶處), 수레박물관, 제국박물관을 둘러봤다. 영걸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깊은 향기가 산천에 깊이 스며있었다. 춘추시대 산동에 있던 제(齊)와 노(魯) 두 나라를 생각한다. 제가 임치에 풍성한 역사적 유물을 남겼다면, 노의 본거지 곡부에는 공자의 유적뿐이다. 원시유학의 가치에 심취한 벗은 곡부에서 궁금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나는 위대한 공자보다 따뜻한 공자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궁금했던 곳은 전단(田單)이 화우진(火牛陣)으로 연군을 물리친 즉묵(卽墨)성이었다. 즉묵은 멀리 노산과 발해를 등지고 너른 들판를 품은 풍족한 고장이었다. 이곳마저 잃었다면 제는 진작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염파(廉頗)를 앞세운 연(燕)의 공격을 받은 제는 즉묵과 거(莒)만 남았다. 거는 황해에 연한 지금의 낭야 일대이다.

망하기 일보직전에 즉묵에서 기사회생한 제를 나중에 전(田)씨가 차지한 것도 필연이었다. 나는 즉묵에서 우연과 필연의 구분을 깊이 생각했다. 인과율(因果律)이 필연을 의미한다면 세상에 개연성(槪然性)은 없다.

개연은 인과를 모르는 소치일뿐이다. 인과의 증명이 과학이다. 인과율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의외성이자 돌연변이다. 그렇다면 의외성을 필연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지성의 역할이다.

즉묵에서 낭야로 발길을 돌렸다. 월왕 구천과 진시황 영정의 꿈과 야망이 몇백년의 시차를 두고 펼쳐졌을 지금의 낭야는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

주변의 지형으로 보면 오히려 칭다오보다 항구로서는 좋은 조건이다. 독일이 칭다오를 선택한 이유는 군사적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천이 오를 멸한 후 해안을 따라 북상해 낭야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한 것은 탁견이었다. 강국 제를 멸하고 산동반도를 장악하고 발전방향을 내륙이 아니라 발해만과 해양으로 돌렸다면 아시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산동에서 강소와 절강에 이르는 연안지역은 사실상 월의 판도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야심만만했던 그는 중원의 패권에 연연하다가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사후 월은 산동의 연안을 따라 북방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제의 압박을 받아 남하했다가 부흥한 초에게 망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낭야는 오랫동안 번성했다. 낭야왕씨는 동진의 명문거족이 돼 남방으로 내려갔다.

소흥에 터전을 마련한 왕희지 일가는 낭야왕씨였다. 나는 생의 마지막을 산동에서 보내고 싶었다. 낭야와 노산이 마음에 들었다. 벗들과 동행한 노산은 과연 도가의 본산다웠다. 낭야의 바닷가와 노산의 바위산에서 웅대한 대자연과 호흡을 나눈다면 분명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여름에 다시 노산으로 갔다. 기도처를 찾아 며칠을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흘째 되는 날 앙구만을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 선상에 거대한 비석과 같은 바위를 보았다. 무엇에 끌린 것처럼 올라갔다. 거기에는 옛 청나라 황실의 후손으로 기품이 넘치는 공주께서 산자락의 농가를 구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박하고 신비한 집을 꾸미고 있었다. 그녀가 오랜 가족처럼 반겨줬다. 이곳으로 오게 된 인연은 무엇일까?

오래전에 북악이 바라보이는 파주의 봉일천에서 살았다. 중국의 25사를 10년을 소모하며 읽었다. 마지막 청사를 대했을 때 엄청난 분량에 기가 죽었다. 중화민국은 청사를 아직도 편찬정리하지 못했으므로 청사고(淸史稿)라는 형태로 산재된 자료를 모아뒀을 뿐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키워드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