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승 충효예문화운동본부 공동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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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의 본래 명칭은 효창원(孝昌園)이다. 조선왕조 제22대 정조(正祖)의 맏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와 어머니 의빈성씨(宜嬪成氏)의 무덤이 있는 효창묘(孝昌墓)에서 유래 했으며 1870년(고종 7) 12월에 효창원으로 승격됐다. 일제 강점기인 1944년 왕가의 무덤을 경기도 서삼능으로 강제로 이장해 조선의 법통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악랄한 만행을 저질렀다.

살아생전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이 본래 명칭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효창원은 1921년 6월 숲을 없애고 골프장, 1925년 대홍수가 발생하자 이재민들의 천막촌, 1930년 유원지, 그리고 소나무를 제거해 벚꽃, 플라타너스를 심었다. 그리고 왕가의 무덤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했다.

광복 후 1946년 김구 선생이 환국해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삼의사의 유해를 이곳에 모셨다. 같은 해 이동영(李東寧), 조성환(曺成煥), 차이석(車利錫) 임정 요인의 유해도 모셨다.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유학자겸 독립운동가) 선생은 효창원을 효창공원으로 변경하는 계획을 알고 필사적으로 항의하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추모장이 돼야 한다고 ‘효창공원을 통곡함’이라는 애절한 시를 지어 읊었다. 전문을 소개한다.

“효창공원에 스산한 바람 불고 처절한 비 내리는데 통곡하며 부르노라 일곱 선열의 영혼을 땅속에 묻힌 말라버린 뼈 일찍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멋대로 공병대의 괭이 아래 파헤치는가, 저 남한산 저 탑골공원을 보라. 하늘을 찌르는 동상이 사람의 넋을 빼앗는구나 독재의 공과 덕이 이렇듯 높을지나 두고 보시오 상전(桑田)과 벽해(碧海) 일순간에 뒤집힐 것을.”

심산 김창숙 선생의 애국 혼이 빛을 보아 공사가 멈췄는데, 1959년 제2회 아시안컵 축구대회 경기장으로 다시 수난을 겪었고 1961년 5.16 군사혁명 후 골프장 공사가 재개됐는데 각계각층의 반대로 무산됐다. 1969년 원효로가 있다고 하여 원효대사 동상이 세워졌고, 2018년 12월 11일 문재인 정부는 효창공원을 국립묘지 수준으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흐름 속에 2020년 10월 성장현 전 용산구청장은 이봉창 의사 성장터에 이봉창 역사울림관을 건립했다. 김구 선생의 묘,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가묘를 포함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가 묻혀 있는 4의사의 묘, 임정 요인 이동녕 선생, 조성환 선생, 차이석 선생의 묘가 있는 효창공원을 본래의 명칭인 효창원으로 되돌리고, 6호선 전철 효창공원앞역을 효창원역으로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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