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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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전제와 관료정치 하에서는 관료들끼리의 이해관계가 병존한다. 관료집단에 들어가면 황권과 백성들에 대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유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권익과 관직의 분배, 승진과 이동, 득실이 균등하지 않거나 불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충돌과 투쟁이 벌어진다. 당헌종 이순(李純, 778~820)은 천하가 점차 안정되기 시작하자, 오락과 성색에 빠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우선 그는 화려한 궁실과 정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일찍부터 재상이 되려고 했던 황보단(皇甫鏄)은 헌종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 후, 여러 차례 부세에서 사용하고 남은 것을 보고해 토목공사 비용으로 사용하라고 건의했다.

헌종은 여론을 무시하고 그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황보단은 자기가 인심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선 그는 교묘한 방법으로 황제에게 아부해 자기의 지위를 다졌다. 신임을 얻자 내외직 관리들의 봉록을 깎아서 국가의 용도에 보충하자고 건의했다. 헌종은 추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다행히도 급사중 최우봉(崔祐封)이 조서를 감추어서 이 일은 무산됐다. 그러나 백관들이 분노했다. 당시 궁중에서 사용하던 불필요한 물건은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매년 한 차례 탁지상서에게 매입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물건은 너무 낡아서 사용할 수 없었다. 황보단은 헌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가로 매입하도록 종용했다. 능라와 비단은 썩어서 냄새가 진동했고, 손으로 집으면 가루처럼 날아갔으므로 어디에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것을 변방의 군대로 보내자 군사들은 그것을 보고 기가 막혀서 모두 모아 불을 질렀다. 배도(裵度)가 변방의 군사들이 황제의 하사품인 능라와 비단에 불을 지른 과정을 자세히 폭로했다. 그러나 황보단은 황제의 면전에서 자기의 다리를 내보이면서 상주했다.

“저의 이 신발은 내고를 정리하면서 얻은 것입니다. 2천전으로 이 신발을 샀는데 매우 튼튼해 아직도 말짱합니다. 군사들이 내고를 정리하면서 나온 것을 사용할 수 없다고 떠드는데, 그 가운데에는 속임수나 부실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헌종은 그의 말을 믿었다. 황보단은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배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한 전공을 세운 조정대신이었다. 그를 시기한 황보단은 재상 이봉길(李逢吉), 영호초(令狐楚)와 결탁해 배도를 내각에서 쫓아냈다. 대신 최군(崔群)은 조정에서 성망이 높아 상하가 모두 존경했다. 그가 나서서 당시의 적폐를 지적하고 비판했다. 최군에게도 원한을 품은 황보단은 진작부터 그를 해칠 기회를 노렸다. 조정에서 황제에게 존호를 바치는 문제를 상의할 때 헌종에게 상주했다.

“어제 신하들이 모두 황상에게 올릴 존호를 상의했습니다. 유독 최군만은 폐하의 존호 가운데 효덕(孝德)이라는 두 글자를 추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헌종은 발끈 화를 내며 최군을 강등시켜 외직인 호남관찰사로 내쫓았다. 황보단은 금오장군 이도고(李道古)와 결탁해, 방사 유필(柳泌), 승려 대통(大通)이 불로장생술을 터득했다고 헌종에게 추천했다. 중위 토돌승최(吐突承璀)는 황제의 은총이 깊었다. 황보단은 그에게도 뇌물을 줘 환심을 얻었다. 재상의 자리에 오른 그는 대권을 독점하고 정무를 마음대로 처리했다. 사사로이 당파를 조직해 자기를 위한 유리한 조건을 창조했다.

황보단은 덕종시대에 진사가 돼 감찰어사, 이부원외랑, 판탁지, 호부시랑 등을 역임했다. 재상의 자리를 노리던 그는 온갖 계략을 동원해 동료들을 모함했다. 그에게 감히 반대하는 정적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그에 대한 헌종의 신임과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그는 부드러운 방법으로 황제를 속이고, 동료와 정적들에게는 강경한 방법으로 모함, 타격, 배제를 실행했다. 황보단과 같은 간악한 인간들이 지금이라고 사라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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