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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2022.10.05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필자는 오랜 세월 역사 속에 존재하였던 다양한 인물의 행적을 연구해 칼럼을 통해 소개하는 활동을 했으나 세종(世宗)의 생애(生涯)를 다룬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필자가 출생한 안암동(安岩洞)에 거주했던 세종의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생애에 관심을 가진 것이 강력한 동기부여(動機附輿)가 돼 세종의 생애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세종은 태조(太祖)가 1392(태조 1)년 7월 17일 개성(開城)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창업(創業)한 지 5년 후가 되는 1397(태조 6)년 5월 15일에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준수방(俊秀坊)에서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사이에 3남으로 탄생(誕生)했다.

이와 관련해 세종이 탄생한 준수방은 경복궁(景福宮)의 서문(西門) 영추문(迎秋門) 건너편 의통방(義通坊)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 일대로 추정되는데, 구체적으로 청운동(靑雲洞)을 흘러내리는 한 줄기 맑은 물과 옥인동(玉仁洞)으로 내려오는 인왕산 골짜기의 깨끗한 물줄기가 합치는 조그마한 삼각지대가 준수방의 일부였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탄생한 이후 문신(文臣) 윤저(尹抵)의 집에 보내져서 부인(夫人) 동복오씨(同福吳氏)가 키웠으며, 1408(태종 8)년 12세 충녕군(忠寧君)에 봉(封)해졌으며, 그해 같은 달에 경기도(京畿道) 양주(楊州) 출신의 문신 심온(沈溫)의 딸과 길례(吉禮)를 올렸다.

이후 16세가 되는 1412(태종 12)년 경복궁 서쪽에 경회루(慶會樓)가 완성됐으며, 그해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진봉(進封)됐으니 이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언을 하고 일정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을 의미했다.

한편 충녕대군 시절 세종을 키워준 유모 오씨(乳母吳氏)는 1444(세종 26)년 세상을 떠났는데, 세종은 왕위에 오른 이후 오씨를 극진히 대우했으며 세상을 떠난 이후 종이 150권을 비롯해 정포 50필, 흰 모시 10필, 쌀과 콩 70석을 하사(下賜)해 어린 시절 키워준 점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본래 태종의 뒤를 이어서 왕위를 계승할 인물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으나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궁중생활(宮中生活)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사냥, 풍류 생활(風流生活)을 즐겼는데 이러한 양녕대군의 행동에 대하여 종사(宗社)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부왕(父王)인 태종을 비롯하여 신하들의 근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이러한 상황에서 양녕대군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훈계(訓戒)했으나 특별히 개선되는 점이 없어서 결국 신하들의 주청(奏請)을 수용해 양녕대군을 왕세자(王世子)에서 폐위(廢位)하고 그 대안(代案)으로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冊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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