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주필)

 
갈매기, 부산 갈매기 우는 남포동 바닷가의 자갈치 시장은 여로(旅路)의 낭만을 살리고 미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곳이다. 시장기가 도는 오후 6시 30분에 부산역에 도착했으므로 배가 출출할 때다. “형님 자갈치로 가입시더!” ‘자갈치 가자’는 말을 내가 막 껴내려는 순간이었는데 애칭 ‘부산 갈매기’, 김옥만 아우가 내 마음을 딱 짚어내듯 말한다. “좋지!”

‘먹자’는 데는 탱크 같이 육중하고 우람한 김동길 아우도 이의가 없어 보인다. 이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무척이나 반가웠던 것 같다. 그는 원래 무지할 만큼 잘 먹는다. 한 잔 마시기도 전에 벌써 취기가 있는 것처럼 얼굴이 붉으스레해지며 환하게 밝아지는 특유의 표정이 나온다. 사람이 여럿일 때 이렇게 완벽하게 의기투합하기도 어렵다. 하긴 먹자는 제안이니까….

허기질 때 먹자는 제안보다 더 반가운 것이 있을까. 아무리 좋은 구경이라도 먹고 난 다음의 일 아닌가. 더구나 왁자지껄하고 비린내 진동하는 자갈치 시장은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을 지닌 곳이다. 그 매력이 우리 셋의 완벽한 의견 일치를 이끌어내는 데 더 많은 작용을 한 것 같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먹어야 육신이 살고, 육신과 정신의 건강이 유지된다. 하지만 오늘 ‘3인의 자갈치 회식’은 그 같은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 자리만은 물론 아니다. 그 보다는 특별한 주제 없이 이루어지는 정담과 방담, 담소가 그저 즐겁고 기분을 살리는 자리다. 그 같은 즐거운 자리가 곧 이루어진다는 기대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자갈치에 들어서려는데 ‘끼륵! 끼륵!’ 갈매기가 운다. 갈매기들끼리 뭔가를 주고받거나 스스로를 표현하는 음성 신호일 것이지만 마치 우리를 환영하는 듯 들린다. 갈매기는 사투리를 쓰지 않나? 내가 듣기에는 인천 갈매기나 목포 갈매기, 부산 갈매기 울음의 음조(音調)가 똑같은 것 같다. 갈매기 울음이 그들의 말이라면 스톡홀름, 암스테르담, 앵커리지, 샌프란시스코, 시드니, 발리에서 들은 그들의 말과 말투도 부산 갈매기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김옥만 아우의 부산 사투리는 나에게 언제나 정겹다. 그래서인지 김옥만 아우가 말할 때 갈매기가 따라 말하듯이 우연히 울거나, 갈매기가 울 때 김옥만 아우가 말을 할 때는 그때의 갈매기 울음은 부산 사투리로 말하고 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야! 김동길 아우님, 아우님이 듣기에는 아니 그런가?” “응, 그렇다고!”

항구에서는 갈매기 울음을 능가할 가왕(歌王)은 없다. 갈매기가 항구의 첫째가는 가왕이다. 그 가왕들의 울음이 어둑어둑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항구와, 여로(旅路)에 항구를 찾은 내 마음속 깊숙이 파고들며 메아리친다. 사람들은 ‘끼륵 끼륵’ 하는 갈매기 소리를 통상 ‘운다’고 말하지만 그 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기분에 따라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으로 다르게 들릴 뿐인 것이 아닌가. 때로는 즐거운 노래, 슬픈 노래일 수도 있다. 적어도 오늘, 바로 내가 외롭게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형제 같은 벗들과 함께 있는 이 순간만은 갈매기들도 즐겁게 노래하며 춤을 추는 것 같다. 이 순간 내 기분에 그렇게 들리고 그렇게 보인다.

모든 생명체들의 삶 자체는 인간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치열한 경쟁, 바로 생존경쟁의 연속이다. 오늘 내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저 갈매기들은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부럽게도, 먹이 사냥이 충분했든지 아니면 성공적인 구애(求愛)를 이루어냈든지 했을 것 같다. 실패와 성공이 끊임없이 뒤바뀌고 뒤섞여 금석지감(今昔之感)을 자아내는 너무나 다른 하루하루 속에서, 적어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저렇게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것쯤에는 아랑곳 하지도 않고 그들 나름의 생(生)의 기쁨(Pleasure)을 표현하기에 바쁜 것이 아닐는지. 그들이 오늘의 형편과 내일의 형편이 너무나 다른 하루하루에 대해서 인간이 말하는 금석지감이라는 느낌을 갖는지 안 갖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셋은 갈매기가 ‘퍼드득, 퍼드득’ 날갯짓을 하며 노래하는 어느 횟집의 창가에 자리 잡았다. 환한 꽃처럼 밝은 미소를 띤 종업원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며 상(床)차림을 위해 봄 장다리 밭 나비처럼 사뿐 사뿐 움직인다. 우선 컬컬한 목을 축이면서 메인 디시(Main dish)이자, 동시에 목을 축일 때의 사이드 디시(Side dish)인 감칠맛 나는 생선회를 감상하고 난 후, 청(請)에 따라 식사를 하는 순서로 정성스럽게 상차림이 이루어졌다. 생선회는 손질이 잘 돼 윤기가 자르르 흐르며 육질이 부드럽게 씹히면서 목 넘김이 감미로웠다. ‘뭔가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셋은 보통 사람들이 드나드는 집을 찾은 평범한 손님들 중의 일부였지만 그 집이 우리를 알게 모르게 ‘세심히 배려하며 존중한다’는 인상을 갖게 해준 것이 고마웠다.

이 집의 VIP단골인 김옥만 아우의 설명에 따르면 ‘매콤, 새콤, 달콤, 공개되지 않는 비법으로 만들어져 그 맛이 오묘한 이 집의 초고추장은 그 특별한 맛의 역사를 50년 동안이나 여일(如一)하게 이어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느낀 ‘특별한 맛과 그 맛이 자아낸 특별한 분위기’는 신선한 재료와 능숙한 장인의 손질, 초고추장과 종업원의 성실하고 친절한 봉사의 환상적인 앙상블(Ensemble)이었던 셈이다. 더 말 것 없이 그 앙상블이 그렇게나 오랜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손님을 배려하는 그 집 주인의 창조적이며 독특한 ‘앙상블 연출(Ensemble acting)’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집은 큰 부자가 될 가치와 자질, 능력을 충분히 지닌다. 많은 돈을 벌어 개인 행복을 창출하는 것은 기본이며 나라에 세금을 많이 내어 국가 재정을 돕게도 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상을 마주하고 앉은 우리 셋의 대화는 창밖 갈매기 소리의 톤을 넘어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한동안 먹기에 열중하던 김동길 아우가 “우와~, 흐~음, 우~움, 맛있다!” 하고 갈매기 소리의 톤을 뛰어넘는 탄성을 지른다. 그러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지갑을 꺼낸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지갑 속을 더듬어 파란 색깔의 지폐, 한 장인가 두 장인가를 끄집어내어 종업원에게 내민다. ‘그럼 그렇지, 우리 셋이 다 마찬가지지만 이럴 때 절대로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 김동길 아우는 원래 먹기도 잘 하지만 인정도 많아 어려운 이웃에 대한 배려가 남다른 사람이다. 이런 경우, 비록 주는 사람에게는 눈곱만한 풋돈에 불과하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큰 행복감을 안겨줄 수 있다. ‘고맙소! 행복의 싹을 틔우기를 한 톨의 밀알이 되기를 바라오!’ 하는 것이 그의 마음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회식은 그렇게 끝났다. 우리는 지금 선창을 따라 산책하며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이 얘기 저 얘기를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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