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게 선진 정치인데 한국 정치는 정치인 스스로 불신의 골짜기로 몰아가고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2주가 지났건만 아직 국무회의도 열리지 않고 있다. 헌정 사상 유례가 드문 일로 국정이 비상사태 아닌 비상사태를 맞았다. 그러한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새 정부가 책임지고 운영해나갈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아직까지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일반 국민들은 단순히 정부조직법이 부처를 정하고 장관 임명에 필요한 것처럼 알고 있지만 이번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통상적인 정부조직에 관한 법 개정과는 다르다.

정부조직법은 ‘국가행정사무의 체계적이고 능률적인 수행을 위하여 국가행정기관의 설치·조직과 직무범위의 대강을 정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이다. 그렇지만 새 정부 출범에 앞서 당시 대통령 당선인 측은 국정 철학에 맞춰 중앙행정기관을 개편했다. 미래창조부, 해양수산부 등 일부 부처를 신설하고 행정안전부는 안전행정부로 명칭 변경되는 등 정부조직법상의 변경을 가져 왔고, 이 법 부칙에서 중앙행정기관의 변경과 관련된 법을 일괄 개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중앙부처의 신설과 명칭 변경에 따라 관장하는 법의 소관 변경 내용을 정부조직법 개정안 부칙에 담아 일괄 개정을 시도한 것이다. 그런 만큼 이번의 정부조직법이 개정되지 않고서는 새 정부가 어떠한 법적 업무도 수행할 수 없는 딱한 형편에 처해졌다. 법의 체계나 절차상 개별법은 개별법의 개정 절차를 거쳐야 합당하지만 수백 개에 이르는 법을 개별적으로 처리하는데 시간상, 절차상 복잡하여 편의상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부칙으로 일괄 개정하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하였는바, 이러한 것은 새 정부가 출범하는 경우의 부득이한 조치다.

그러므로 박근혜 정부 출범과 관련되어 처음으로 개정하게 되는 정부조직법은 단순히 정부조직에 관한 내용을 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 정부가 향후 운영하는 국정 전반에 대한 법적 근거를 담고 있는 것으로 중차대하다. 따라서 이 법이 개정되지 않고서는 새 정부에서 변경되는 기능은 적법성을 가질 수 없다. 사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새 정부 출범 전에 미리 해결해놓고 그기에 맞춰서 장관을 임명하고 정책을 펴는 게 순리이고 마땅했다.

어느 정부든 간에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는 초기부터 새로운 정부를 이끌어가려면 그 준비가 완벽하게 돼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통령직 인수 로드맵에 따라 사전에 조치할 정부조직법 개정 등 핵심 사안을 처리해야 하건만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유야 어쨌든 실기(失期)했다. 이로 인해 국정 수행에서 차질을 빚고 국민은 불안감을 갖게 되며, 국회 처리과정에서 여야가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국민에게 정치 불신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여당이 정부를 지원하는 정치적 우호 세력이라면 야당의 기능은 정부 견제라 하겠다. 그런 역할을 잘 아는지라 야당은 때로는 야당 본성을 십분 발휘하여 새 정부에 대해 정략적으로 나올 수도 있다. 정상적인 관계 같으면 새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길게는 1년 정도 일정기간은 ‘허니문기간’으로 정하여 야당이나 언론에서 대통령이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고, 정부가 순조롭게 항행하도록 지원하는 입장인데 어찌된 판인지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다.

박근혜 정부가 운영할 정부조직법의 개정과 관련하여 여당의 책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야당 또한 정략적으로 시간을 끌면서 국민의 지지를 받고 탄생한 정부가 현재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도록 지연시키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국정의 발목잡기’라는 국민 비난을 면할 수 없다. 특히 ‘개점휴업’이라는 식물 정부의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 정부·여당에 대해 야당이 개정안 처리과정에서 비정상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도리나 정도(正道)가 아니다.

당초에 야당에서 제기한 문제는 방송통신위원회가 갖고 있는 종합유선방송(CATV)과 인터넷TV(IPTV) 등의 인·허가권을 중앙행정기관인 미래창조과학부로 이관하는 정부조직법개정안의 내용이 핵심 문제였다. 여야가 그동안 실무협상을 통해 인터넷TV를 미래창조과학부로 이관하고 종합유선방송은 방송통신위원회에 그냥 두기로 어느 정도 의견이 접근되었지만 케이블방송의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문제가 다시 걸림돌이 돼 의견 상충의 평행선을 달려왔던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던 중 민주당 측은 느닷없이 정부조직법 개정과 무관한 ‘공영방송이사 추천 시 재적위원 3분의 2 찬성으로 의결토록 하는 특별 정족수안 도입’ 등 3가지 조건을 들고 나왔다. 그 조건을 들어주면 정부조직법 개정안 원안을 수용한다는 것인데, 이는 박근혜 정부가 처한 위기의 딜레마를 이용한 제의였다. 이 제의는 민주당이 정보통신위원회 업무를 미래창조부에 이관하는 정부조직법을 반대한 이유로 공영방송을 내세웠지만, 결국은 공영방송에 대해 관여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이면에 깔려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정치가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의 잣대라면 꼼수를 버리고 국민 여망에 따라 대의(大義)를 좇는 게 지극히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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