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강자는 자기 실력만으로 약자를 밀어붙여서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강자와 대치하는 약자도 대부분 심리적으로나 행동으로 강자의 위협에 대항할 준비를 한다. 따라서 아무리 강자라도 강제로 약자를 굴복시키려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국가끼리도 마찬가지다. 범인 한 명을 잡기 위해 수많은 경찰인력이 투입되는 것처럼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할 때도 치밀한 계략을 세워서 실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희생만 커질 수도 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상대할 때는 우선 약소국의 경계심을 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적어도 지금의 미국처럼 힘을 앞세워 우격다짐으로 약소국을 밀어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의 대북전략이나 대중동전략은 이런 의미에서 낙제점을 면치 못한다.

중국역사에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병탄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서진(西晉)이 손오(孫吳)를 평정한 경우가 좋은 사례이다. 양양(襄陽)을 지키던 진의 양호(羊祜)는 손오의 육항(陸抗)과 대치하고 있었다. 손오의 경계심을 푸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양호는 사로잡은 포로를 모두 송환하고 여비까지 주었다. 또 자기가 점령했던 말릉(末夌)을 비단과 교환했다. 오나라 사람이 쏜 화살에 맞은 짐승이 자기 영토로 들어오면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혹시 모를 오의 의심을 풀기 위해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육항은 덕을 따르고, 나는 폭력을 따른다. 육항은 전쟁을 하지 않고 스스로 굴복하기만 기다릴 것이다. 각자 경계선을 지키고 쓸데없는 전투를 하지 마라!”

오가 차츰 경계심을 풀고 있는 동안 서진은 차근차근 침략할 준비를 갖추었다. 양자강 상류인 사천(四川)에서 거대한 전함을 건조하고, 하북(河北)에서 중무장한 군사들이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했다. AD 279년 말, 진은 20만 대군을 다섯 길로 나누어 총공격을 펼쳤다. 왕염(王黶)이 이끄는 진의 수군은 오가 장강을 지키기 위해 쳐놓은 철쇄를 기름을 사용하여 불태우고 남하하여 무창(武昌)을 점령한 다음 오의 수도인 건업(建鄴)으로 향했다. 다른 공격로로 진격한 진군이 힘을 모아 석두성(石頭城)을 함락하자, 오주 손호(孫皓)는 스스로 결박하고 항복을 청했다. 삼국시대의 한 축을 담당하던 오는 이렇게 망했다.

수(隋)가 남방의 진(陳)을 평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는 남북의 수확시기가 다르다는 점에 착안했다. 진의 수확철에 소규모의 군사로 강변에서 시위하다가 진이 수비를 강화하면 재빨리 철수했다. 진은 수확을 제대로 하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 몇 차례 반복되자 진의 수비태세가 느슨해졌다. 이번에는 소부대가 강을 건너 식량창고를 불태우고 물러나는 것을 반복했다. 진은 점차 피곤해졌다. 진의 방비가 결정적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수는 50만 대군을 8로로 나누어 진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북송과 요가 서하(西夏)를 공격한 경우는 실패사례이다. AD 1044년, 요의 흥종(興宗)은 서하가 불복하자 친히 삼군을 이끌고 공격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방에 웅거하던 요는 서하 따위는 단숨에 짓밟을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적을 만난 서하는 적군을 자국의 영토 안으로 깊이 유인하고, 굳게 성문을 닫았다. 청야령(淸野令)을 내려 요가 현지에서 군량을 조달하지 못하게 했다. 서하는 교만해진 요군을 기습공격으로 대패시켰다. 그로부터 약 40년 후인 AD 1081년, 송의 신종(神宗)이 다섯 갈래로 대군을 파견하여 서하를 공격했다.

서하는 이번에도 유인책을 사용하여 송군을 자국의 영토 안으로 깊이 끌어들이고, 보급로를 차단하여 고립시켰다. 송군은 초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전력이 약화되어 마침내 아무런 공도 없이 후퇴했다. 서하군은 송군을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요와 송의 용병술은 모두 위세를 떨치며 요란하게 공격하는 정공법으로 적의 전의를 상실하게 하려는 전략이었다. 북 한 번 치지 않고 이기려는 생각이었으나, 군사적 기밀을 중요시하지 않아서 서하로 하여금 미리 충분한 대비를 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새 대통령이 야당과 국민을 상대할 때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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