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에는 절기 중 설날을 뜻하는 정조(正朝)와 동지(冬至)가 되면 정전(正殿)에서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모두 나와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이를 ‘정조하례(正朝賀禮)’라 한다. 사진은 창경궁 명정전 전경과 신하들이 하례 올리는 모습을 재현, 편집했다. (천지일보 DB)

임금, 문무백관 하례 받고 회례연 베풀어
승정원 3일간 휴무… 관청·시장도 동참
벽사·기복 의미 담아 세화 그려서 하사

[천지일보=김성희 기자] 묵은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밝았다. 정월 초하룻날,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백성까지 새해를 맞이하며 축하인사를 해왔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권국가에서 벗어난 오늘날도 그 풍습은 이어져 오고 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새해 아침, 색색의 고운 설빔을 갈아입고 집안 어른들을 윗자리에 모셔 건강을 기원하며 세배를 드리고 자손에게는 복을 빌어주며 신년을 맞이한다. 또 가래떡을 어슷하게 썰어 끓인 뜨끈한 떡국을 먹으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 그릇 더 주세요”를 외쳐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가족들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설의 풍습도 있지만 이제는 볼 수 없는 궁궐의 새해는 어떤 모습일까. 구중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설날의 풍경을 찾아가 보자.

조선시대에는 절기 중 설날을 뜻하는 정조(正朝)와 동지(冬至)가 되면 정전(正殿)에서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모두 나와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이를 ‘정조하례(正朝賀禮)’라 한다. 왕비 역시 내전(內殿)에서 왕세자빈과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았다.

이러한 의식은 왕권의 기틀이 잡힌 신라시대 이후 나라의 어버이인 왕에게 예를 다하고 왕실의 위엄을 궁 안팎에 알리기 위해 거행됐다.

조선 후기 순조(純祖) 때 홍석모(洪錫謨)가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풍속집인 ‘동국세시기(1849)’에는 정조하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의정대신(議政大臣)들은 각자의 집에서 일찍이 제사를 마친 후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가 새해문안을 드린다. 또 새해 하례의 내용을 사륙체(四六體, 네 글자와 여섯 글자로 된 한문체)로 기록한 전문(箋文)과 표리(表裏, 시골에서 짠 거친 옷감)를 가지고 정전 뜰에 줄을 지어 조하(朝賀)를 올린다. 팔도에 파견된 관찰사‧통제사‧병사(兵使)‧수사(水使)‧목사(牧使) 역시 전문과 방물(方物, 조정에 바치던 각 지방의 특산물)을 왕에게 바친다. 주(州)‧부(府)‧군(郡)‧현(縣)의 호장(戶長)도 궁에 와서 반열(班列)에 참례한다.”

왕세자와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은 왕은 신하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세종대왕은 1433년 1월 1일(세종 15년) 처음으로 아악(雅樂, 고려‧조선 연간 궁중의식에서 연주된 전통음악)을 사용한 회례연을 베풀었다. 실록에는 소헌왕후 역시 내전에서 회례연을 베풀었다고 기록돼 있다. 궁중연회는 참연자에 따라 외연(外宴)과 내연(內宴)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검소함을 전통으로 하므로 상황에 따라 임금이 명을 내려 식만 거행하는 권정례(權停例)를 행하기도 했다. 이때는 예문(禮文)에 예제(禮制)를 만들고 실제 의식을 생략했다.

궁에서는 설날부터 3일간 승정원(承政院)이 공무를 중단했다. 이에 모든 관청과 시장도 문을 닫고 일하지 않았다.

하례를 받은 왕은 연회를 베푸는 것 외에도 벽사(辟邪)와 기복(祈福)의 의미를 담은 그림인 ‘세화(歲畵)’를 신하와 백성에게 하사했다. 이는 조선 초기부터 풍습으로 자리 잡아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궁에서 처음 시작된 이 풍속은 민간에까지 퍼졌다. 세화는 주로 문짝에 붙이기 때문에 문배(門排) 혹은 문화(門畵)라고도 불렸다.

▲ 미국 오리건(Oregon)대학교 조던 슈나이처 박물관(Jordan Schnizter Museum of Art)이 소장한 왕실회화 ‘십장생도 10폭 병풍’(위), 지난해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임진년 용띠 해를 맞아 경복궁 사정전 내부에 그려진 ‘운룡도(雲龍圖)’를 ‘세화(歲畵)’로 제작한 그림(아래). (사진제공: 문화재청,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신라시대 이후 조선 초기 세화에는 역귀(疫鬼)를 쫓는 벽사신인 ‘처용(處容)’을 그렸지만 주로 중국 도교와 관련된 문신들 담았다. ‘동국세시기’에는 세화에 대해 “도화서(圖畵署)에서는 수성(壽星,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 및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 그날을 담당하는 신)의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올리고 또 서로 선물하는데, 이를 세화라 한다. 그것으로 새해를 축하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궁중에서 사용하는 세화는 12월 20일경 도화서에서 제작해 왕에게 진상했다. 이 세화는 우열별로 등급을 분류해 각 전(殿)과 종실, 재상, 근신에게 하사했다. 조선 초기에는 매년 60여 장이 제작됐으나, 연산군 무렵 늘어나 중종 연간에 이르러서는 신하 한 사람당 20장씩 내렸을 정도로 방대한 양이 제작됐다.

많은 양의 세화를 그려내기 위해 도화원에서는 임시로 차비대령(差備待令)의 화원을 고용해 1인당 30장씩 그리게 했다. 이들은 왕실과 관련된 서사(書寫) 및 도화(圖畵) 활동을 우선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차출되는 임시직 화원으로 당대 최고급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도화서 산수화원은 각자 20장씩 그렸다.

세화는 매년 제작했지만 나라의 흉사가 있을 때는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숙종 46년(1720)’에는 “12월 국상으로 전례에 따라 3년간 세화 제작을 중단키로 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흉년이 들거나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세화제작을 중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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