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진나라 시황제는 37년(기원전 210) 10월부터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남쪽의 회계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낭야에 이르렀었다. 그때 승상이 된 이사와 중거부령 조고 등이 따랐다. 조고는 부새령(옥쇄를 관장하는 관리)을 겸하고 있었다.

시황제에게는 20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부소는 황제가 하는 일에 여러 차례에 걸쳐 잘못을 지적하며 바로잡을 것을 건의하였기 때문에 노여움을 사서 멀리 북녘 변방의 상군으로 쫓겨 가서 수비군을 감독하고 있었다. 당시에 상군의 군사를 지휘하던 사람은 명장 몽염이었다.

왕자들 가운데 시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것은 막내 호해였다. 그는 시황제가 나라 안을 보살피러 순행하는 길에 동행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시황제를 따르는 왕자는 오직 그뿐이었다.

37년 7월 시황제는 사구 땅에 이르러 중병을 얻었다.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깨달은 그는 조고에게 명령하여 맏아들 부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게 했다.

- 군사는 몽염에게 맡기고 곧장 함양으로 돌아와 짐의 유해를 맞이하여 장례를 거행하라 -
서한은 봉인되었으나 부소에게 사자를 보내기 전에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황제의 서신은 옥쇄와 함께 조고의 손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시황제의 죽음은 비밀에 붙여졌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조고와 이사, 호해였고 그밖에 시황제의 총애를 받던 환관 5, 6명뿐이었다. 그들에게 함구령 조처를 내린 것은 승상 이사였다. 황제가 순행 중에 세상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황태자도 아직 책봉되지 않았으므로 황제의 죽음을 발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황제의 유해는 온량거(황제의 수레)에 안치하고 계속 돌아다녔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여러 관리들의 보고가 이루어졌고 식사 때에는 황제의 수라상이 온량거로 날라졌다. 결재는 온량거로부터 환관이 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조고는 조나라 왕족의 먼 일가였다. 그의 형제들은 조나라가 망할 때 모두 환관으로 끌려갔고 어머니는 사형을 당하였다. 외지에 있다가 화를 모면한 조고는 비천한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하여 형법에 통달해 있었다. 시황제는 그가 형법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 중거부령으로 등용하게 된 것이다. 조고는 등용이 되자 곧 왕자 호해에게 소송과 재판의 진행 과정을 가르쳤다.

조고가 중죄인의 혐의를 받은 일이 있었다. 황제는 몽의(몽염 장군의 동생)에게 명령하여 법에 따라 판결하도록 했다. 몽의는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관직을 빼앗았다. 그러나 황제는 조고의 부지런함과 성실성을 참작하여 죄를 용서하고 관직과 작위를 돌려주었다.

조고는 시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마음이 달라졌다. 평소에 총애하는 호해를 황태자로 옹립하려고 했다. 조고는 몽의에 대해서 항상 앙심을 품고 있었다. 자신이 중죄인으로 그에게 심문을 받을 때 혹독하게 당했던 일을 잊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없애 버리려고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서한과 옥쇄를 손에 거머쥐고 호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승하하셨습니다만 큰아들인 부소에게 서한을 내렸을 뿐이고 어떤 왕자를 황제로 봉한다는 조칙은 없었습니다. 이제 부소가 돌아오면 황제가 되실 겁니다. 그렇게 되면 왕자께서는 한 치의 땅도 주어지지 않을 것인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호해가 그 소리를 듣고 말했다.

“어진 임금은 신하를 알고 어진 아비는 아들을 안다고 하지 않았소. 부왕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왕자들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으니 그에 대해 따질 까닭은 없을 것이오.” 조고가 그 말을 바로 받았다.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천하의 권력을 얻느냐 잃느냐는 왕자님과 나, 승상 이렇게 세 사람이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황제가 되느냐, 신하가 되느냐,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