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을 전하다 핍박받아도 선(善)을 부정하지 않는 용기 필요

미디어가 범람하는 시대일수록 언론의 역할과 기능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렇지만 언론의 속과 성격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과 논조(論調)가 다르기 때문에 독자들이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이제는 ‘언론도 믿을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이 다수의 국민들이 공감하는 현실이다. 언론사와 언론인은 당연 ‘정직한 목격자’ ‘시대의 청지기’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착각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더욱이 한 집단이나 단체에 소속된 경우 그 폐단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여기에 각 종단을 대변하는 종교계 언론은 특수지로서 그 성격이 확연히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보니 상대 종교를 폄하한다든지 같은 종교 내에서도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대에 기독교언론은 어느 자리에, 어떠한 모습으로 서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이 이 시대 기독교언론에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지 한 번 고민해보자.

 

▲ ⓒ올댓뉴스

기독교 언론이란

언론이라는 것이 권력에 빌붙으면 언론으로서의 생명은 이미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사회 언론이 정권, 기업과 결탁하게 되면 언론을 접하는 대중들은 사건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교 언론도 종교재단에 의지하게 되면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만다.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김서중 교수는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의 작은 목소리를 담는 기능이 종교 언론이자, 기독교 언론의 역할이다”라고 강조하면서 “기독교 언론이 교단에 의지하면 결국 사회의 소수 목소리와 교회의 소수 목소리가 다뤄지기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다수의 기독교 언론들이 각 교단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언론’이 아닌 ‘대변지’ ‘주보’의 수준에 멈춰서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이승구(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는 기독교 언론의 역할에 대해 “그저 교계 뉴스만을 전달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각 교단의 기관지들도 하고 있는 것이기에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며 “기독교 언론사들은 적어도 기독교의 분명한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작업과 함께 어떤 문제에 대해 기독교적인 입장으로 제시할 때에는 성경에 근거한 것만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기독교 언론 중에서도 연합지, 초교파지의 역할에 대해 여타의 교단지가 하지 못하는 기독교적 여론 형성과 기독교 내 화합과 상생을 도모하는 일에 앞장서주기를 주문했다.

그렇지만 타 종교간의 이해, 사회 문제를 기독교적 시각에서 다루고 해결을 모색하는 지혜,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기독교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반목과 갈등을 일삼고 있으니, 말 그대로 ‘내 코가 석자’이다 보니 어디 사회를 돌아볼 여유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 언론 역사는 1897년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죠션그리스도인회보)와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그리스도신문)에 의해 시작돼 현재 100여개가 넘는 기독교 언론이 존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그 증가량에 비해 오늘날 기독교 언론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미약하기만 하다.

 

‘중도’ 지키는 정론지의 역할

앞서 이야기했듯이 언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기사 하나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언론의 제(諸) 기능 중 하나가 여론 형성임을 보았을 때 잘못된 기사 하나가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오는 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렇기에 언론은 진실을 보도하고 사건의 본질을 파헤쳐 올바른 여론을 형성해야 하며, 사회 계도의 역할을 선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사의 독자적인 판단을 개입시켜서는 안 되며, 개인이나 단체를 대변하는 나팔수가 되어서도 안 된다.

어디까지나 ‘중도’의 입장에서 사실을 사실답게 전하고, 더 나아가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언론의 기능은 기독교 언론에서 더욱 중요하다. 종교 신문의 목적 중 하나가 ‘전교(傳敎)’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 신문은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주목적이기에 기사 하나 하나, 글자 하나마저도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육면이나, 기획이라면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이다. 자칫 한 교단, 교파의 교리나 사람의 생각으로 풀어 만든 주석이 섞여 들어가게 되면 그것을 보는 독자들의 신앙이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독교 언론에서 중요시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부분 즉,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아닌 사람이 임의로 지어낸 말이나 세상의 것이 마치 진리인 양 포장되어 보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 신앙의 기준도 ‘성경’이 되어야 하겠고, 기독교 언론의 기준도 ‘성경’이 되어야 한다.

이 하나를 기억한다면 각 기독교 언론이 서로를 향해 손가락을 뻗지 않을 것이요,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식의 비난을 일삼지 않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 언론이라 하여 명망 있는 목회자나 대형교회의 동정만을 보도해서도 안 된다.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 독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들이 원하는 기사 또한 담아내야 한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한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쩌면 권력에 아첨하고, 대형교회만을 부각시키는 잘못된 기독교 언론의 행태가 한몫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터넷 글쓰기’의 작가 김성묘(전 레이디경향 편집국장)씨는 개신교는 편협한 의식에 사로잡혀 자기의 울타리에 자신들이 갇혀있는 것 같다며, 기독교 언론은 이를 세밀히 관찰해서 편견을 타파하기 위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덧붙여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는 개신교 안에서 목회자간, 평신도간 또 목회자와 평신도가 참여할 수 있는 대화공간을 언론이 맡아줘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기독교 언론은 이제 더 이상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종교라면 분명 만국을 소성하는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만국소성을 달성하고자 한다면 타 종교를 비롯해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반목과 질시는 이제 그만해야 할 때다. 오히려 상생하고 화합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만들어가는 데 있어 기독교 언론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성경을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참뜻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상에 찌들어 있는 기독교 세계, 6천년 긴 역사 동안 사단의 주관 아래 놓여 있어 진리를 분변하지 못하고, 빛으로 나아오길 두려워하는 이 세대에 진정한 진리의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 그 길이 때론 핍박과 조롱으로 점철된 길일지라도 옳은 것은 옳다 할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야 한다.

선(善)을 전하다 핍박받는다고 선(善)이 아니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언론이 언론으로써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선(善)을 선(善)이라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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