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회자되고 있는 최고의 화두가 뭔가 했더니 ‘평화’란다. 이는 인류의 근본된 정신이자 이념이며,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촌 그 어디를 둘러 봐도 평화는 찾아 볼 수 없다. 평화 대신 다툼과 분쟁 그리고 전쟁만이 난무한 현실이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평화’, 이 평화는 언급했듯이 인류가 존재하는 이유면서, 우리 내면의 생각과 의식과 정신세계를 이끄는 종교의 최고의 가치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인류 최고의 가치인 평화 대신 다툼과 분쟁과 전쟁의 근본과 그 중심에는 바로 종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 대표적 예가 200여 년 긴 세월 치러왔던 십자군 전쟁이다. 11세기 들어 유럽은 이민족(異民族) 침입이 줄어들면서 안정을 찾았고, 이어 시장 형성과 도시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은 멀리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이나 미지의 세계였던 동방세계와 원거리 무역을 가능케 했으며, 이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세력 확대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이슬람세력인 셀주크 투르크족(중앙아시아의 소수민족 투르크족이 마호메트에 의한 이슬람권을 평정해 거대 이슬람 문화권 형성)이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었고, 그리스도교 순례자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 황제는 로마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교황 우르반 2세는 당시 동(동로마 황제에 의한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황제)로 분리돼 있던 교회를 통합하는 야욕의 기회로 삼고자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명분으로 원정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200여년 긴 세월 동안 수차례 걸쳐 진행된 십자군 원정은 1차를 제외하곤 모두 실패로 끝나는 소모전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신(神)의 이름은 빌렸지만 인간의 욕망이 개입된 부질없는 전쟁이었음을 역사를 통해 깨닫게 한다. 뿐만이 아니라 인류가 생성되고 지금 이 순간까지 진행돼 오는 전쟁의 역사, 이는 종교의 이름을 내세운 우리 인간의 욕망을 한없이 드러낸 종교와 이념의 산물이 되고 말았다.

이 대목에서 다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까지 깨지고 무너지고 파괴된 평화를 다시금 근본된 평화로 회복하는 반전(反戰)의 역사 또한 바로 종교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평화의 문제를 우리의 현실 가운데로 가져와 보자. 오늘날 이 한반도의 현실은 지구촌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분단의 현장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이는 한반도의 통일이 곧 한반도를 넘어 인류평화의 초석임을 의미하는 증거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은 인류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에 관한한 대한민국은 물론 온 세계가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냉정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무늬만 또는 모양만 통일과 평화를 주창해 온 것은 아닌지 한번쯤 뒤돌아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통일과 평화의 문제는 구호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온 인류가 통일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인식하고 염원할 때 가능하다는 이치를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통일 내지 평화 운동을 하는 단체는 수없이 많다. 또 통일과 평화를 위한 방안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거기에는 모순이 있다. 즉, 정부와 및 기관은 업적과 권력유지의 수단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사회와 및 일반단체는 과시 내지 보이기식은 아닌지를 자문자답해 봐야 한다.

과거 북한 김정일 전 위원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회담 시, “남쪽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통일 정책이 바뀌어서 통일정책에 관한한 신뢰를 할 수 없다”는 지적이 왠지 자존심을 건든다. 하지만 진정 통일을 위한 정책이 아닌,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 유지 내지 기득세력의 입장에 둔 보이기식 정책이었음을 솔직히 시인해야만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요구되는 통일정책과 통일과 평화운동은 어떠한 것인가. 온 국민이 통일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깨달아, 통일 운동에 동참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통일운동의 목적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여기서 또 하나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1982년 동독 라이프찌히 리콜라이 교회문을 월요일 밤마다 열어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젊은이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갖게 한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가 있다. 즉, 동독의 ‘월요 평화 기도운동’을 주도한 목사다. 이 모임은 1989년 10월까지 지속되었다. 1989년 10월 어느 월요일 밤 교회에는 8천 명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수천 명이 교회 밖에서 어둠을 밝게 비췄다. 이 기도의 물결은 동독 전체로 퍼져 나갔다. 동독 전체로는 이날 밤 100만여 명의 자유를 외치는 자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이 시위는 결국 장벽을 허물고 독일을 통일로 이끄는 시발점이 됐다.

다시 말해 독일 통일의 원동력은 통일을 열망하는 독일국민의 통일 의식에서 비롯됐으며, 이러한 국민의 열망을 빌미로 당시 메지에르 동독 총리가 권력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결단을 내림으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교훈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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