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와 서경덕 교수가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는 순국선열의 정신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옛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이어받는 일은 개인주의가 팽배해지고 외세의 압력이 여전한 이 시대에 더욱 요구되고 있는 덕목이다.

이에 호국의 뿌리를 의병역사를 통해 살펴보고, 현재는 고인이 된 백범 김구 선생과 한국 홍보전문가인 서경덕 교수가 호국정신에 대해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목소리를 담았다.

 

구한말 봉기한 의병운동, 독립정신으로 이어져

당시 의병에는 농민, 군인, 포수 등 여러계층이 참여했다.

의병(義兵)운동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민중이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고 외적에 대항해 싸운 구국운동이다. 의병운동의 처음 발단은 을미사변이다.

당시 청·일 전쟁(1894년)의 승리로 한국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일시적으로 저지됐다.

일본은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왕후를 시해했으나, 반일 의병투쟁을 야기함으로써 더욱 수세에 몰렸다. 이 을미의병의 투쟁은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친일정권이 무너지면서 단발령이 철회되고, 정부의 해산 권유에 따라 대부분 종식됐다.

하지만 일제가 침략을 적극화하면서 일방적으로 을사조약(1905년)의 체결을 발표하며 한국에 대한 식민적 지배의 정치적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에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도처에서 거세게 일어났다(을사의병). 을사조약으로 인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다시 봉기한 의병들은 조약의 폐기와 친일내각의 타도를 내세우고 격렬한 무장항전을 벌인 것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정미조약(1907년)이 체결되는 등 충격적인 정변이 연이어 일어나는 가운데 군대해산으로 국가 멸망의 징후 앞에서 민중적 봉기가 보다 폭넓게 확대됐다(정미의병).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을 시발점으로 해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했던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의 조직과 화력이 강화됐다. 이 시기의 의병조직과 활동은 전국각지로 확산됐을 뿐만 아니라, 두만강 건너 간도와 연해주에까지 이르렀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기록화)

한편, 전국의 의병부대가 서울 진공을 위한 연합전선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인영과 허위가 지휘하는 1만여명의 의병연합부대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해 그 선발대가 서울 근교까지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이 심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때 의병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해 스스로 독립군임을 내세웠다.

홍범도와 이범윤이 지휘하는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의병부대가 국내 진공작전을 꾀했으며, 의병으로 활약하던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던 의병전쟁은 그 뒤 일본군의 잔인한 이른바 남한대토벌 작전을 계기로 크게 위축됐다.

그러나 많은 의병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로 옮겨 가 독립군이 돼 계속 일제에 강력한 항전을 전개했다.

의병전쟁은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일어난 구국운동의 대표적인 형태였고 민족의 강인한 저항정신을 표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나아가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항일민족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뤘다.

뿐만 아니라 의병전쟁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의 약소국 침략이 극심하던 시기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세계 약소국의 독립운동사에서도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백범 김구 가상 인터뷰

“호국정신은 ‘화합’으로 완성하라”

백범 김구
현충일이라고는 하지만 뒤숭숭한 시국에 김구선생의 마음도 편치 않아보였다. 앉은뱅이 상을 두고 마주 앉아 청년처럼 맑은 미소를 베푸는 김구 선생의 말을 들어봤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만나 뵙게 돼 영광입니다. 요즘도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임시정부 때에 비하면 소일거리 수준이죠. 허허.

네, 반갑습니다. 임시정부 때에 비하면 소일거리 수준이죠. 허허.

 

-잘 아시겠지만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슬픔이 나라에 가득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서로 책임의 소지를 분명히 하자며 충돌이 발생하고 있는데요. 마음이 편치 않으시겠습니다.

오늘날 소위 진보다 보수다 하는 것도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합니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 학설도 일시적이지만 민족의 혈통은 단절되지 않습니다. 어느 민족에서나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바람이 잔 뒤에는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상황에서 우리 국민에게 꼭 필요한 호국 정신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미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자주독립 국가를 세웠습니다. 이제는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민족이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스스로 숨거나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투쟁의 정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인 것입니다.

내 몸이 남의 몸이 될 수 없음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으며,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보다 더 완전한 영원함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바로 오늘인 것이요,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사해동포(四海同胞)의 문화입니다.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어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실현되기를 원합니다.

 

-얼마 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선생님을 인생의 멘토로 삼고 싶다는 대답이 굉장히 많이 나왔는데요. 아직도 청년들이 선생님을 잊지 않고 있나봅니다. 

허허, 만나 보지도 못한 이 늙은이를 기억해주니 고맙군요. 나는 우리 청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나나 그들이나 똑같을 것이라 믿습니다. 다만 젊은이들이 모두 소인배 같은 생각은 버리고 세계를 이끈다는 큰 사명을 가지고 마음을 닦아 실력을 기르고 그것으로 즐거움을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힘을 모은다면 몇 년 못돼 우리가 세계의 주연배우로 우뚝 설 것입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젊은 친구들에게 더 바라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우리 청년들은 반드시 지구촌을 사랑과 평화의 문화로 지배할 것이기에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저는 그토록 바라던 그 나라의 문지기가 돼 영원히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 인터뷰

“올바른 역사의식이 애국의 정신” 

한국 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
최근 독도 문제와 동북공정 등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일련의 상황은 우리에게 호국정신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호국의 정신이 점점 퇴색돼 가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한국 홍보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서경덕 성신여대 객원교수에게서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호국정신에 대해 들어봤다. 현재 그는 동해와 독도 관련 광고를 뉴욕타임스 등 세계 유수언론에 게재하는 등 한국 바로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서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호국정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올해는 3·1운동 90주년, 임시정부수립 90주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젊은이들의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나라를 거창하게 알리는 것만이 국가사랑은 아니라고 봅니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는 것 또한 나라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젊은이들의 경우, 특히 대학생들은 이런 역사와 소명 의식을 갖는 게 미래를 봤을 때 더 유익할 것입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오늘날 젊은 세대가 호국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나라사랑을 거창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무엇보다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독도 문제에 대해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나오면 우리나라는 분개만 하지 실질적으로는 무관심한 부분이 많습니다. 따라서 독도의 가장 큰 적은 일본이 아니라 우리의 무관심입니다.

일본에 대응하는 방법으로는 젊은이들의 경우 친구들과 함께 독도에 방문한 뒤 여행이야기를  유시시(UCC)로 만들어 유튜브 등에 올리는 것도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또 해외 유명 관광지에 한글 낙서가 많은데 우리가 해외여행 시 글로벌 에티켓을 지키는 것도 애국의 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해외에서도 우리나라를 올바로 바라보게 됩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요즘 해외에 진출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좋지만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의 것도 정말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것을 모르고 남의 문화를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또 우리의 것을 잘 알아야 해외에 나가서도 한국을 올바로 전파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기본적으로 역사의식을 정립했으면 합니다.

 

-지난달에 ‘뉴욕타임스의 실수(Error in NYT)’라는 광고 게재를 주도하셨는데 그 이후의 반향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일본 산케이신문과 미국 USA투데이 등 세계적인 신문이 와서 인터뷰를 할 만큼 세계 언론의 관심이 높았습니다. 특히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에서는 광고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또 세계 각지 한인 교민들이 자기들도 똑같이 광고를 내겠다며 광고파일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보내 왔습니다. 결국 뉴욕타임스 전면 광고를 통해 삼중 효과를 봤습니다.

하지만 일본으로부터는 협박 메일과 전화도 많이 받았는데, 정말 마음이 아팠던 것은 한국 내 친일세력으로부터 “일본이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런 광고를 내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반면 일본의 몇몇 교수들은 “용기있는 행동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이 힘들텐데, 당신의 양심적인 행동을 일본인들이 배웠으면 한다”고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에 동해 관련 광고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방침입니다. 그 이유는 세계적인 신문사에서 아시아 관련 보도 시 ‘Sea of Japan(일본해)’으로 표기된 관련 그림을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해가 틀렸고 동해가 옳다는 캠페인을 진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글로벌 광고판들이 즐비한 뉴욕타임스퀘어 광장에 독도와 동해 관련 영상광고를 연내에 내보낼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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