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개전투식 선교’ 욕심에서 비롯돼… 오직 한 복음으로 순수 신앙 회복할 때

1980년대 초교파적 부흥 이뤘던 북한선교 재조명

지난 15일 북한이 개성공단에 적용됐던 기존 법규와 계약 무효를 일방적으로 선언함에 따라 개성공단 폐쇄가 불가피해졌고, 22일 현인택(통일부) 장관은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 참석해 “북한이 (개성공단) 폐쇄 요구를 할 때는 안 할 수 없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답했다. 민족의 정치·경제적 교감이 끊기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간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에 본지는 지금과 달리 뜨거웠던 과거 북한선교를 향한 열기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본지는 지난 155호에서 북한선교를 위해 기증한 땅을 놓고 분쟁이 일어난 사건을 기획으로 다룬 바 있다. 북한선교를 위해 기증한 약 33만㎡(10만평)의 땅을 두고 땅을 기증받은 H선교원과 증여한 조관실 권사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땅을 증여했던 조 권사 측은 한국교회가 북한선교를 위해 각개전투식으로 뛰는 것보다 함께 나서야 함을 촉구했었다.

이후 본지는 그 당시 함께했던 목회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분쟁의 한 가운데 선 H선교원의 전신인 북한선교원의 사역 당시 자료들을 통해 초교파적으로 뜨거웠던 열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통일의 염원 담긴 북한선교원의 태동

북한선교원에서 발행했던 소식지인 ‘할렐루야 아멘’ 1984년 9월, 12월호와 1985년 1월호 표지를 통해 당시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9월호 맨 위 사진에는 조관실 권사를 비롯한 사역자들의 사진도 보인다.

1984년 당시 충현교회(담임 김창인 목사)에서는 북한과 북한의 동포를 위한 선교의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본지가 접한 당시 자료들(소식지와 팜플렛, 신문)에는 북한선교를 위한 교인들과 목회자들의 활동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북녘 땅에 잃은 동포 복음으로 되찾자’라는 구호 아래 북한선교원이 개원한 뒤 이 같은 뜻에 마음을 합한 조관실 권사(10만평), 현신애 권사(2400평), 박봉주 권사(8만평) 등이 땅을 기증해 토대를 마련했다. 

전국의 목회자와 평신도를 대상으로 전도훈련, 경건훈련 등이 추진됐고, 무혈통일 후 북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준비에 최대한의 노력이 기울여졌다.

한국교회의 최대 성장기였던 당시 누구보다 통일에 대한 염원이 뜨거웠던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 마음과 무릎을 모았던 것이다. 한 번 집회를 할 때 적게는 2천명에서 많게는 5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북한선교원이 있는 곳은 45인승 버스 100대 이상, 자가용 수백 대 정도가 모였다고 한다. 당시의 경제상황을 비춰볼 때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북한 선교원에는 신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목회자들도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대형교회 목회를 하고 있는 최요한·김제돈 목사 등도 당시 북한선교를 위한 뜨거움과 헌신을 직접 몸으로 겪은 장본인들이라고 한다.  


한국교회 잘못된 것 바로잡고 북한선교 열정 회복해야

왼쪽부터 최요한 목사, 조관실 권사, 김창인 목사, 권의수 목사

“민족복음화를 위해서 이제 북한선교원에서 특공대를 키울 목적으로 지난 여름에도 강원도 정선에 가서 2685명이 훈련을 받았고 월요일 저녁마다 북한선교 특공대 성경공부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마다 철야기도회로 모입니다. 지난 1월 제4차 훈련에는 1000여명이 참석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1985년 북한선교원 소식지인 ‘할렐루야 아멘 2월호’에서 김창인(전 북한선교원 이사장·충현교회 원로) 목사는 ‘가나안 복지를 앞에 놓고’란 제목의 메시지를 통해 이 같은 비전을 밝혔다. 이 글은 당시 북한선교의 규모와 사역이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초창기 북한선교가 김창인 목사로부터 시작이 됐을 때에는 북한선교에 대한 사명의식이 고취되어 전국에서 선교의 열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었다는 것이 그 당시 목회자들의 증언이다.

이때 북한선교원의 조직도를 보면 대의원과 이사·감사를 비롯한 임원, 지회장들의 수만도 182명이었고, 전체 전도대원은 5100여명이었다. 목회자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교회는 달랐지만 북한선교를 위한 간절함으로 한마음이 되어 뛰었을 만큼 교단·교파를 초월한 초교파적인 모임이었다.

당시 북한선교원은 300여명의 목회자들을 가르치는 목회대학원을 운영했고, 기독교여성대학원을 통해 여성사역자들을 배출했으며 평신도들의 사명의식을 깨우는 훈련원의 몫을 감당하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북녘 땅에 잃은 형제 복음으로 다시 찾자’ ‘휴전선아 열려라 복음 들고 가리라’ 등의 구호들을 바탕으로 한 북한선교를 위한 염원에서 비롯됐다.

당시 북한선교원 베드로사단 지도목사이자 목회대학원 원감이었던 권의수(인천성림교회) 목사는 그때의 활동들을 회상하며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진짜 이것이 사명이 아니면 쓰러질 정도로 풀가동을 했었다”면서 “그 당시에는 민족을 살리는 것이란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에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기쁘고 즐거웠다”고 전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선교원 집회가 있을 시 버스가 많을 때는 120대가 넘을 정도였고, 평신도들도 ‘이것이 정말 시대의 사명’이라 여기며 뛰었다고 했다.

이처럼 북한선교를 향한 열기가 뜨겁다 보니 선교를 위한 후원과 가진 재산을 전부 헌납하는 일이 많아졌고, 이것은 통일을 향한 간절함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의 절정기를 뒤로하고 2009년에 이른 지금, 선교원은 또 다른 명칭과 의혹 속에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가 하면 법적 분쟁으로 세상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때 당시 북녘동포를 향한 간절함에 가진 재산을 헌납하고 선교를 위해 쓰여 지길 바랐던 이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과 법 앞에 ‘진실을 밝혀 달라’며 호소하고 있고, 선교원 측과는 대치하는 씁쓸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고, 북한선교원은 왜 그때의 열정을 잃어버린 것일까. 

“조00 목사가 김창인 목사에게서 이사장권을 탈취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988~1989년도 북한선교원의 수석목사로 사역했던 남서울비전교회 최요한 목사의 증언이다.

최 목사는 “전국에 130개 대학에 신학대학과 일반대학에 있는 기독동아리 안에 북한선교팀이 있었다”며 “훈련이 있을 때는 전국의 100여개의 지회에서도 올라오고, 학생들은 수천 명이 참석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선교를 위한 불이 활화산 같이 일어났던 것을 회상하면서도 “(김창인 목사의 은퇴와 동시에) 조00 목사가 사심이 생겨서 김창인 목사를 몰아내고 자신이 이사장이 되면서 함께 사역하던 목사들을 다 내보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형식적으로는 목회자들이 나간 것처럼 되어있지만 그나마도 겨우 생계만 유지할 수 있는 월급을 안 주거나 깎기도 했으며, 자리를 이동시키는 등 스스로 나가도록 유도를 했다는 것이 최 목사의 설명이다.

그는 “목회자들이 나가고 난 다음 그 자리에 조00 목사의 사람을 채워 이후로 북한선교원이 완전히 조00 목사의 개인 선교훈련원이 돼버렸다”며 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으로 북한선교의 열기가 지속되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할렐루야 아멘’지 1984년 9월호에 실린 조직도이다. 이 조직도를 통해 당시의 북한선교원 규모를 알 수 있다.

북한선교원과 관련해 지난 4월29일자 SBS 뉴스추적이 방송되면서 선교원을 둘러싼 700억 땅 분쟁 사건이 회자되자, 선교원 초창기 함께 사역했던 몇몇 목회자들이 이번 조관실 권사의 땅 찾는 운동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최 목사는 지금의 현실에 대해 “한마디로 통탄할 일”이라며 탄식했다. 그는 “한 목사님이 자기 일생을 바쳐서 민족을 통일하겠다는 열망으로 북한선교운동을 시작했는데 개인(조00 목사)의 사욕 때문에 이것이 무너지게 됐다”며 “자기의 전 재산을 바쳐서 민족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여종의 염원이 무참하게 짓밟혀진 현실에 목사로서 자괴감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북한선교원이 본래의 목적을 잃고 잘못된 길로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권의수 목사 또한 마찬가지다. 권 목사는 조00 목사가 북한선교를 위해 그 당시 누구보다 열정이 뜨거웠던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현 상황은 “무슨 일로 연연했는지 잘 모르나 정도로 가지 않고 곁길로 간 것은 사실”이라며 “이제라도 목회자로서 나서는 것은 지난 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조00 목사가 원위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귀한 종들과 함께 힘을 모아 한국교회와 더 나아가서 북녘동포를 위해서 사심 버리고 일하기를 바랄뿐이다”는 바람을 밝혔다.  

이제야 나서게 된 배경에 “그동안 선교원을 지켜보면서 하고픈 말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바로 하겠지, 돌아오겠지’ 했던 것들이 이제야말로 여러 사람들이 다시 힘 모아서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들이 모였다”고 설명했다.

목회자들은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북한선교원이 본래의 목적을 잃은 것은 이제 분명코 회복되어야 한다”며 “우리가 역사의 산증인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같은 목회자들의 움직임에 조관실 권사는 힘을 얻는 눈치다. 조 권사는 “벌써부터 나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했어요. 혼자 뛰는 바람에 좀 늦어졌을 뿐”이라며 “당연히 해야 할 책임이 있다”란 뼈있는 말을 남겼다. 한국교회의 더 많은 목회자들이 나서야 함을 촉구하는 것이다.  


북한 동포들이 정치적인 압박과 경제적인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실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내 민족 내 동포가 저 북녘 땅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있으며 울부짖고 있다.

지금은 북한을 위한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이 한국교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북한 선교를 위해 선한 의도로 기증된 재산이 불법적으로 사유화 되는 사태에 대해 방관하거나 구경하는 사람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북한선교를 부르짖어 왔지만 단체나 교회별 구호활동에 그치는 각개전투식에 머물렀다.
이제는 힘을 합쳐야 할 때다. 조관실 권사의 기증재산이 본래의 목적대로 쓰이도록 한국교회가 용기있게 나서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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