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송범석 기자]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제2차 세계대전 때 실험한 모든 부분들을 확실하게 검토하고 완성하는 장이었다. 선전선동과 심리전을 위한 ‘삐라’ 역시 그러한 것들 중 하나였다. 한국전쟁 동안 미군, 한국군, 북한군, 중국군이 모두 ‘삐라’라는 비슷한 유형으로 선전 또는 심리전을 벌였는데, 제대로 놓고 보면 미국의 심리전과 북한 또는 중국의 선전선동술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띤다.

일단 북한의 선전은 사회주의 선전선동론을 기반으로 했다. 물론, 첫 대상은 북한 주민이었다. 아울러 북한의 선전은 공산주의자인가 비공산주의자인가에 따라 사물과 역사에 관한 이론적 확신을 목적으로 하거나 미군은 악이고 사납다고 알려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북한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노예’ 등이나 ‘평등하게 사는 인민’ 따위를 선전 주제로 삼았다.

반면 미국 심리전의 일차적 대상은 자국민이 아니라 적군과 민간인이었다. 심리전은 적의 사기 저하를 유도해 투항하게 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목적을 뒀다. 또한 미국의 심리전은 ‘아군’은 ‘선한’ 존재라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미국의 심리전이 자국민에게 민주주의의 운영 원리, 자유, 자본주의, 독립된 개체로서의 개인, 평등 따위를 설명하기보다 공산주의의 이미지와 호명을 생산한 까닭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실제로 1950년 11월 유엔의 참전 목적을 알리는 구호는 ‘평화‧통일‧재건’이었다. 이 구호는 ‘미국에 저항, 북한 원조, 고향을 보호’라는 중국의 슬로건에 대항해서 나왔다. 이 삐라는 유엔의 구호인 평화, 통일, 재건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군사적 목적인 평화, 정치적 목적인 통일, 경제적 목적인 재건이라는 구호는, 제법 그럴듯했다.

일단 미국은 평화를 이미지화하는 데 두 가지 단상을 사용했다. 하나는 현실에 없는 판타지의 이용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력에 의한 제압이다. 가령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뿌린 삐라에선 한 남자가 논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그는 부인과 자식들이 가져온 새참을 먹으러 걸어 나오고 있으며,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삐라는 물론 그저 좋은 시절을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삐라 속 그림 옆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문구가 기록돼 있다. 바로 “공산 두목들이 침략전쟁에 몰아넣지 않았으면 화평했을 것”이라는 문구다. 그림 속 평화는 ‘공산군이 침략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 상황이며, 현실에는 없는 행복인 셈이다.

한편으론 이러한 행복을 회복하기 위해 유엔이 노력하고 있다는 점도 알렸다. 관련 삐라를 보면 어른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시장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필요한 물건을 사고,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 삐라 속 그림에는 “그 시절-유엔은 그리운 그 시절을 회복하기 위하야 힘쓰고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결국 이 행복했던 현실을 가운데 두고 한쪽에는 이를 파괴한 원인으로서의 공산주의가, 다른 한쪽에는 이 행복했던 시절을 회복시켜줄 유엔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적을 삐라로 묻어라>는 한국전쟁에 관심을 갖고 여성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연구해온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이임하 교수가 1950년대 미국이 뿌린 삐라를 통해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심리전의 양상을 살펴본 책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획일성, 폭력, 제국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세계 기구에 대한 맹신, 개인과 국가의 일체화 등이 미국 심리전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지적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다양한 고증을 바탕으로 삐라의 내용을 분석하고 삐라 속 상징, 이미지, 기호를 살펴본다. 삐라에 담긴 심리전의 상징, 이미지, 기호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재생산됐으며 교육되었는지 설명한 이 책을 통해, 현대 한국인의 신념체계가 어떻게 형성됐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제1장에서는 미국의 심리전 정책과 기구를 다루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심리전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실험하는 장이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실험장을 거치면서 미국은 심리전 기구나 정책과 관련한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후 미국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냉전 이데올로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제2장에서는 극동사령부와 8군사령부의 심리전 매체를 다루었다. 심리전 수행의 구체적인 매체는 라디오 방송, 삐라, 확성기 따위이다. 극동사령부, 8군사령부, 국방부 정훈국에서 생산한 삐라들의 내용, 뿌려진 지역, 심리전 정책에 따라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본다.

제3장에서는 삐라의 내용을 분석하고 삐라 속 상징·이미지·기호를 다루었다. 상징·이미지·기호는 ‘실재’가 아니지만 실재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매개체이자 연상 작용의 고리이다. ‘적’은 늑대, 이리, 뱀 따위로 묘사되거나 노예와 죽음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리고 유엔이 어떻게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는지, 미군이나 미국이 어떻게 ‘구호자’로 규정됐는지 따위의 내용을 살펴본다.

제4장에서는 삐라의 상징·이미지·기호의 재생산 구조를 다루었다. 심리전의 상징·이미지·기호는 한국 사회에서 초등·중등학교 교과서에서 재현, 재생산됐고 교과서에서 재생산된 상징·이미지·기호가 학생들에게 어떻게 교육됐는지 살펴본다.

제5장에서는 심리전의 상징·이미지·기호가 한국 사회의 신념, 윤리, 규범, 가치로 전환되는 과정을 다루었다. 이 가치는 ‘미국적 가치와 윤리’라 할 수 있는데 미국적 가치와 윤리는 심리전을 통해 한국 사회에 뿌리내렸다. 이 장에서는 왜 선전, 선동이 아니라 심리전으로 불렸는지, ‘전쟁 뒤에도 심리전이 계속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총력전의 완성이 왜 심리전인지를 살펴본다.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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