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의 날 12월 19일까지는 후보들에게 물리적으로 빠듯한 시한이다. 후보들은 이 기간 동안 자신들이 가진 체력과 정신력, 지혜를 선거 컨설턴트들의 기획과 연출에 따라 유감없이 발휘하고 남김없이 소진해야 한다. 이렇게 ‘모사재인(謀事在人)’의 최선을 다하면 ‘성사는 재천(成事在天)’이므로 승부를 떠나 설사 지더라도 최소한 그 자체로 위안을 삼을 수 있다.

야권이 후보를 내느라 진통을 겪는 동안 일찍이 경선을 치러낸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는 소위 펄펄 나는 광폭(廣幅) 활동을 선보이고 있다. 누가 봐도 선뜻 발길을 내딛기 어려운, 말하자면 적진의 안마당, 안방, 그 지도자의 묘소들, 열사의 기념관을 담대하게 그리고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띠고 찾아갔다. 바람직은 하지만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다.

박 후보의 그 같은 행보는 정치 공학적으로 보면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다. 정파의 입장에 따라 진정성에 대한 평가는 엇갈려도 객관적으로 본다면 전체를 아우르고 껴안으려는 그 자세 자체가 상징성이 크고 의미가 있으며 보기에 좋은 모습이다. 어딘가에 가서는 발길을 되돌려야 하는 문전박대를 받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박대한 쪽이 인심을 잃었으면 잃었지 박근혜 후보가 잃은 것은 없다.

그렇기에 바둑으로 말한다면 그의 광폭행보는 본인에게 각별한 수고로움은 따르지만 꽃놀이패와 같다. 그는 지금 이렇게 선거판의 분위기를 확 잡고 날개를 넓게 쭉 펴고 펄펄, 훨훨 날고 있다. 초장에 너무 잘 나간다고 하는 말이 일부에 있을 정도다. 대통령 선거는 전국을 강타하는 ‘질풍노도(Strüm unt drang)’와 같다. 그렇다면 박근혜 후보의 여와 야, 보수와 진보를 넘나드는 광폭행보가 먼저 발생한 큰 태풍이 뒤따라 발생한 다른 태풍의 활동과 진로, 세력에 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후지와라 효과(Fujiwara effect)와 같은 영향을 뒤따라 등장할 다른 당 후보들의 활동에 미치게 될지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

그렇지만 박근혜 후보의 대항마가 될 정치권 안팎의 다른 후보들은 공식적으로는 아직 등판조차 하지 않은 상태다. 먼 거리의 하늘에 먹장구름만 유유히 맴돌아 태풍이 만들어지나 싶지 맹렬히 소용돌이치는 위력적인 태풍의 눈은 뚜렷이 형성된 것이 없다. 박근혜 후보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가 될 것으로 주목받는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기술대학원장의 경우만 해도 가부 간 결단의 발표를 빗발치게 요구받으면서도 전혀 쫓기는 인상을 주지 않을 만큼 그의 행보는 느긋하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안 원장은 전문 정치인 특유의 근성인 치열한 권력의지에서가 아니라 정치권 밖의 국민들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샛별과 같은 ‘정치 비전문’의 새 인물일 것이므로 이모저모로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새누리당의 카운터파트인 기존 정치무대의 민주통합당의 후보를 내는 경선은 서둘러 가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펄펄 나는 상대 후보가 있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는 시간이 멎어 버린 행사 같기도 하다. 그나마 아까운 시간은 자꾸 가는데 경선의 산통(産痛)은 크고 흥행은 기대에 못 미치며 후보가 확정되더라도 야권 후보의 단일화를 이루어내기로 한다면 정말 더 어렵고 복잡한 한 고비가 더 남았다는 것이 시간의 지체를 또한 불가피하게 한다. 남구만이 읊은 대로 ‘동창이 밝아 노고지리 우지지는데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는지’ 구경하는 국민들을 초조하게 한다. 이 역시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일의 하나가 될 것 같다.  

선거가 물리적으로 석 달 보름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들은 대선 레이스(Race)의 스타트 라인에 대선 주자들이 한시라도 더 빨리 다 모여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공식적으로 확정된 후보가 단 한 사람뿐인 이런 선거는 아마 요번으로 전무후무할지 모른다. 설마 정치인이 정치 경작과 정치 농사(農事)의 때를 놓치지는 않을 것이지만 참 기이하기는 기이한 경우의 선거판이다. 사실 정치인들이 때를 놓칠 리는 없다. 머지않아 질풍노도와 같이 전국을 강타할 태풍의 눈이 분명해지면서 모든 후보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며 요란하게 선거 운동은 벌어질 것이다.

그때 박근혜 후보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광폭행보를 일본의 기상학자 후지와라가 발견한 후지와라 효과를 닮듯이 다른 후보들 역시 ‘진영(陣營)’의 완강한 반대 없이 여와 야, 보수와 진보를 넘나드는 대담한 광폭행보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만약 그런 모습을 모든 후보들이 보여줄 수 있다면 이 역시 이번 선거판을 기이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역사를 통합과 미래지향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은 하지만 앞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 선거 사에서는 그런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기이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1인을 중심으로 한 패거리 선거, 진영 선거의 후유증과 정치 싸움판 속에서 시달리고 스트레스 받으며 살아왔다. 승자라고 해보았자 유권자 절반의 지지를 받는데 불과한 승자 독식, 패거리 독식과 패자에 대한 나눔과 배려가 없고 소통마저 없는 일방통행이 사회 불평등과 불공정, 지역 불평등을 키워 대립과 분열 갈등으로 국민과 사회를 들끓게 해온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이런 우(愚)가 쌓이면서 정치 불신도 켜켜이 쌓여왔다. 그 불신의 크기와 깊이만큼 정치권 밖에서 신망을 쌓아 정치에 때가 묻지 않은 새 인물 안철수 원장에 대한 많은 국민들의 지지로 나타난 것 아닌가.

이제는 국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는 사회 평화는 없다. 경제도 순탄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통일도, 궁극적으로 국민의 행복도 없다. 이 점에 대해 이번 선거가 정치인들에게 늦었지만 절실한 성찰과 변화의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면 선거판에서 후보가 좀 일찍 뜨고 늦게 뜨는 것은 차라리 부차적인 것이라고 국민들은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길을 서둘러 일찍 나서는 사람이 보통은 먼저 목적지에 도착한다. 다만 지치지 않고 추격을 당하지 않아야 된다. 그렇지만 늦게 출발한다고 꼭 선발주자의 뒤에 도착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지치지 않는 기계가 아니므로 추격을 허락하지 않으려할 것이지만 그래도 추격을 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선발주자가 훨씬 앞서나간 이번 선거에서는 과연 누가 승리의 목적지에 선착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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