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21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건너편에 세워진 일본군 위안부 평화비(소녀상) 모습. (사진출처: 연합뉴스)

20년전 책임 첫 인정, 이후 망언 거듭..당국자 "일본, 각성해야"

(서울=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이하 위안부) 문제에 정부가 관여했다는 것을 일본이 처음 인정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일본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위안부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최근 우경화 경향 속에 일본이 드러내 놓고 위안부 책임에서 `발뺌'을 하려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어 강한 비판이 일고 있다.

최근 격화된 한일간 외교갈등도 역사를 직시하지 않은 일본의 이런 태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처음 `정부 관여'를 인정한 것은 1992년 7월6일이다.

당시 일본 정부의 대변인격인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일본 관방장관은 공식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소의 설치나 운영·감독 등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고 인정하고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 등의 증언과 소송 제기에 "민간 업자가 운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일본 정부가 이렇게 입장을 변경한 배경에는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쥬오대 교수의 활동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1992년 1월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군위안부에 직접 관여한 공문서 6점을 발견했으며 이는 일본 정부의 진상조사 착수로 이어졌다.

가토 담화는 1993년 8월 고노 담화로 이어졌다.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은 담화에서 일본군 및 관헌의 관여와 징집ㆍ사역에서의 강제를 인정하고 문제의 본질이 중대한 인권침해였음을 승인하면서 사죄했다.

이 담화로 일각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낙관하는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담화 발표 이후 일본 우파 정치인들의 강한 반발이 계속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일본이 위안부 동원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배상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제성은 없었다"면서 고노 담화에서 인정된 사실조차 지우려는 듯한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1994년 당시 나가노 시게토 법무대신은 "위안부는 정도의 차는 있지만 미군, 영국군 등도 동일한 일을 한 바 있으며 일본만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가혹하다"면서 "위안부는 당시 공창(公娼)으로 현재의 눈으로 여성 멸시로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태도는 급기야 2007년 3월 아베 신조(安倍晉二) 총리가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증거가 없다"고 발언으로 이어졌다.

이는 올 5월 미국 뉴저지주에 찾아가 위안부 추모비 철거를 요구한 자민당 의원의 행동과 6월에 발생한 `위안부 평화비 말뚝테러'로 계속 현재화되고 있다.

결국 "위안부를 강제동원했다는 직접적 기술이 발견되지 않았다. 각료들 간에 (고노 담화의 수정을) 논의해야 한다"는 마쓰바라 진(松原仁) 국가공안위원장의 27일 발언은 일본 내 이런 인식이 민주당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 자민당 총재 경선 출마가 유력시되는 아베 전 총리는 28일 자민당이 다시 집권하고 자신이 총리가 될 경우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 등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담은 그동안의 일본 정부 입장을 모두 고치겠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일본의 이런 태도 탓에 위안부 문제 해결은 더 난망해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9월과 11월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양자협의를 열자고 일본에 제안했지만 일본은 아직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자는 69명에서 61명(여성가족부 통계)으로 줄었다.

정부 당국자는 28일 "일본 사람들이 각성해야 한다"면서 "일본 언론도 양심있게 보도를 해야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우익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을 강하게 비판했다.

다른 당국자는 "정부 차원에서 공식 발표하고도 다른 발언이 나오고 하는 그런 인식이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선 일본이 역사 인식을 똑바로 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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