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 당대엔 기이, 후대엔 칭송

현대무용은 물론 개혁과 개척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곳에서는 장르를 불문하고 종종 이사도라 던컨의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그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라하의 봄’과 ‘퐁네프의 연인들’로 유명한 줄리엣 비노쉬는 뮤지컬을 준비하면서 존경하는 인물로 이사도라 던컨을 지목했다.

전 민주노동당 문화담당 정책연구원 목수정 작가도 좋아하는 인물로 이사도라 던컨을 꼽았다. 그는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이라는 책 제목으로 화제가 됐던 진보적인 작가다.

이사도라 던컨은 춤이라고는 발레가 전부였던 19세기 후반에 태어났다. 공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 5년밖에 이수하지 못했다. 피아노를 연주했던 어머니 밑에서 그가 한 것은 음악에 맞춰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은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신의 자녀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가 처음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했을 때 그러한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던컨은 신을 소재로 한 이 문학을 통해 춤의 영감을 얻었다. 심지어 신화의 배경이 되는 그리스 일대를 답사하기도 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발레를 거부했고 자연의 소리에 몸을 맡기고 자유스럽게 춤추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오늘날의 현대무용이다. 이 무용은 고향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박대를 당했다.

당시 던컨의 무용은 너무 생소하고 기존의 발레와는 다른 것이어서 무시당하거나 멸시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가 유럽에서 공연했을 때 런던과 파리의 시민들은 던컨의 춤에 호기심을 보였다. 하지만 실제 성공한 것은 독일의 베를린이었다.

그가 의도했든지 의도하지 않았든지 간에 그가 여러 나라를 여행다닌 것은 새로운 무용을 전하기 위한 여행이 됐다.

이사도라 던컨은 신의 자녀일 것이라는 강한 신념으로 자신을 특출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힘이 됐다. 이로써 그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평가를 이기고 혁명가라는 수식어로 불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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