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끝나가는 이 순간까지 가장 큰 실책이 있다면 과연 뭘까. 그것은 편견과 편향으로 일관된 정책일 것이다. 그 실책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 문제까지 꼬이게 하는 악순환을 늘 낳아 왔다. 국내적으로 볼 때는 우선 종교 간 갈등을 부추겨 국민의 총화에 악영향을 미쳤으며, 빈부와 노사와 계층 간에 편견으로 인한 골은 그 어느 때보다 깊게 파이게 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다원화 되고 다양화 된 국제화 시대에 그 중심축의 역할을 감당한다고는 하면서도 그 편견의 습관을 끝내 버리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또다시 이 한반도는 구한말과 다를 바 없는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정책 입안자들은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

미숙하고 아집스런 국제관과 통일관과 외교관과 전술 전략은 밝아야 할 한반도의 앞날을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됐을까를 한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돌아보건대 지나치게 친미(親美)와 친일(親日)적 성향을 보인 정권이 아니었나 생각이 드는 것은 과연 필자만의 생각일까. 그것은 다시 말해 이 나라 수구세력의 점유율이었던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일본의 독도 망언 내지 만행이 있을 때마다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해 정부를 채근하고 압박하기 전에는 늘 미온적 반응을 취해 왔다는 점이 궁금했다. 물론 국민들 입장과는 달리 국제관계는 또 다르다는 정부의 변명 아닌 변명이 늘 있기는 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다. 일본의 사죄를 받기 전엔 눈을 감을 수 없다며 피눈물을 쏟으며 그 고령에도 시민단체와 함께 일본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어도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는 이 나라 정부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인가. 소녀상에 말뚝을 꽂으며 민족의 자존심을 깡그리 짓밟는 왜인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이 정부를 국민들은 과연 얼마나 믿어줘야 할까. 오죽하면 정부의 대처를 기다리다 의분을 참지 못한 60대 남성이 자신의 차를 몰고 일본대사관 정문으로 돌진했을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요즘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인 ‘한일정보협정’이다. 이 사안은 국민의 정서상으로나 그 중요성으로 볼 때 분명 국회 동의를 얻어야 할 내용으로 봐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함에도 한 개인의 책상에서 또는 머리에서 시작해서 이 지구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나라와 몰래 협정을 맺으려 했다는 발상은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임을 분명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누구보고 그 같은 사실을 믿으라는 건가. 또 이제 와선 그 중요성을 희석시키기 위해 ‘군사’ 또는 ‘비밀’ 을 빼고 ‘한일(군사 또는 비밀)정보협정’이라는 용어만 사용하는 처사도 왠지 석연찮다.

우리는 분명 알아야 한다. 미국은 구한말 가쓰라-태프트조약(1905년)을 통해 일본에게 조선을 식민통치하게 만든 원흉이며, 오늘의 독도가 한일 간 영토분쟁지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당시 2차 대전을 승리로 끝낸 연합국은 군령(軍令)을 통해 구 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에서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분명 규정했으나, 샌프란시스코 일본강화조약(1952년)에서 일본이 반환도서에서 독도를 누락시키는 것을 미국이 묵인함으로써 있게 된 비극임을 우리는 분명 상기해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도와 싸운 미국이 왜 일본의 손을 들어 줬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은 중․러의 힘의 견제를 위해선 일본이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즉, 전쟁터는 이 한반도요 그렇다면 전쟁을 위해선 병참기지가 당연히 필요할 텐데 그 역할을 해 줄 나라는 일본 열도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힘의 구도가 생길 수밖에 없는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열강들의 논리 속에 이 한반도는 요리조리 이용당하며 농락당하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또 일본은 어떠한가.

재난(災難)에 의해 일본 열도는 머지않아 사라진다고 한다. 결국 그들의 관심은 이 한반도다. 과거 역사 속에서 이 한반도를 노략질해 오던 그들의 속셈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그들에겐 이 한반도가 천국인 것이다. 호시탐탐 노리는 게 이 한반도다. 그리고 나아가 대륙이다. 임진왜란이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며, 35년 식민통치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오늘날 원전과 재난으로 다시금 일본은 악몽과 함께 살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국방군으로 언제든지 전시에 투입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하겠다고 하며, 동맹군이 공격을 받을시 지원할 수 있는 법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유사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미군이 공격이 받을 시 즉각 이 땅 이 한반도에 일본군을 투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한반도에 다시금 일본군을 주둔시키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도 ‘한일군사보호협정’을 맺을 수 있는지를 묻고 싶다. 북한과는 하나가 될 수 있어도 일본과는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에게나 용서를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함께 가는 것도 아니다. 현재까지 일본은 이 민족에게 행한 그 엄청난 만행에 대해 단 한마디 진정한 사과와 회개를 한 적이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성서에도 이런 말이 분명 있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라고 말이다.

현 정권은 더 이상 그와 같은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당장 어리석은 협정 같은 것은 그만 둬야 할 것이다.

이제는 국민들이 바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ㆍ미ㆍ일 동맹은 북ㆍ중ㆍ러의 또 다른 동맹을 낳게 해 시대에 맞지 않는 한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냉전구도를 초래해 세계화에 역행하는 미련한 처사임을 명심해야 하며, 밀실이 아닌 국민과 소통하고 함께하는 외교력과 전술과 전략으로 선회하는 지혜를 갖기를 당부한다. 끝으로 민족과 백성들이 일제와 목숨 바쳐 싸울 때, 이 나라 기독교 지도자들은 수구세력과 하나 되어 백성들의 피를 빨아 먹고 일본 천황을 향해 절을 했던 그 악몽을 더 이상 떠올리게 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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