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요즘 축구팬들의 관심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에서 동시 개최되는 유로 2012로 모아져 있다. 월드컵에 이어 최대 축구제전인 유로 2012는 축구 강국인 유럽 국가들의 대항전으로 대회 기간 중 유럽은 온통 축구 열기로 달아오른다. 국내서도 유로 2012는 관심이 높아 새벽에 벌어지는 전 경기를 생중계할 정도이다. 국내 신문과 방송 등은 유로 2012 소식을 스포츠면 주요 기사로 연일 다루고 있다.

많은 화제와 선수들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축구팬들이 관심을 가져볼 만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할까한다. 일명 ‘죽음의 경기(Death Match)’이다. 이 스토리는 금주 초 미국의 세계적인 권위지 뉴욕타임스 스포츠면에 게재, 스포츠 기사로는 가장 많이 읽혔다. ‘죽음의 경기’는 유로 2012 결승전이 열릴 우크라이나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이야기이다.

70년 전인 1942년 8월 9일 우크라이나 키예프 제니트 스타디움에서 세계 축구사에서 가장 악명 높고 논란이 많았던 축구 경기가 열렸다. 나치 치하에 있었던 당시 소련의 우크라이나 FC 스타트는 독일 육군과 공군 군인들이 주축이 된 플라켈프를 물리쳤다. 얘기에 따르면 나치는 경기 전과 하프타임 때 우크라이나팀에게 이 경기에서 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러한 위협을 무시하고 우세한 경기를 벌인 뒤 우크라이나 핵심 선수들은 보복으로 처형됐다는 것이다.

최종 스코어는 5-3이었으며, 이러한 얘기는 널리 알려진 듯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선수 4~5명이 경기 후 6개월 이내에 죽었다. 그러나 그들이 축구 경기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죽은지의 여부는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죽음의 경기’ 전설을 대중화한 한 선수가 당시의 스토리를 여러 버전으로 말한 것이 더욱 많은 상상과 추측을 낳게 했다는 점이다.

오래된 축구의 전설이 우크라이나가 유로 2012를 폴란드와 공동 개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죽음의 경기’는 하나의 축구 매치를 넘어서 우크라이나의 신화로 자리 잡아 전승됐다. 키예프에선 역사적 증표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어져왔고, 각종 자료, 책은 물론 미국 영화배우 실베스터 스탤론과 ‘축구 황제’ 펠레 등이 출연한 영화 ‘승리(Victory)(1981년작)’의 소재로도 활용되기도 했다. 최근 유로 2012가 개막되기 전에 러시아인들이 만든 ‘매치(Match)’가 출시됐으며 이 영화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나치의 동조자로 묘사해 우크라이나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학자들과 언론인들은 ‘죽음의 경기’ 전설을 소련 시절 선전용으로 묵살하고 반박자료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일부는 아예 이러한 전설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8백만에서 1천만 명의 시민들이 2차 세계대전 중 죽은 소련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의 애국심과 저항의 상징성을 보여주기 위해 ‘죽음의 경기’ 전설을 전파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역사학자들은 우크라이나와 독일군팀과의 경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죽음의 경기’는 아니었다며 “사람들이 루빈 후드와 같은 전설을 원했기 때문에 이러한 전설이 널리 퍼지게 된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우크라이나 FC 스타트에 이어 키예프를 연고지로 삼고 있는 키예프 다이나모 팬클럽 매니저 키릴 보이코는 “어떠한 사료도 ‘죽음의 경기’에 대한 증거물을 제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나라와 우리의 팀을 위한 애국자들이다. 우리는 전설을 믿고 있다”며 ‘죽음의 경기’에 대한 많은 사랑과 애착을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죽음의 경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한 믿음이 전설에 담겨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경기’ 전설을 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일제치하 민족혼을 불사르며 많은 활약을 했다는 여러 스포츠 영웅과 스포츠 선각자들의 모습들에서 말이다. 스포츠에 생각과 이념 등의 색깔을 입히는 것은 통상 스포츠 밖에서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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