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산스님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핵심을 간파하는 명쾌한 가르침으로 외국 젊은이들을 감동시켜 한국불교로 이끈 스님이 있다. 바로 숭산스님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덜 알려졌지만, 세계에서는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 마하고사난다와 함께 4대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많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외국에 한국불교 전파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을 쓰기도 한 현각스님도 미국에서 열렸던 숭산스님의 강연에 감동을 받아 한국 승려가 됐다.

일반인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법문을 쉽게 전달할 뿐 아니라 깊이 있는 내용으로 많은 외국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비록 유창한 영어실력은 아니었으나, 몇 개의 단어들만으로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여러 나라에 120여 개에 달하는 포교센터를 세웠으며 수많은 외국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와서 승려가 됐다. 한국불교가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한 ‘한국불교의 선교사’ 역할을 한 셈이다.

그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서양철학’의 사상을 인용한 점이다. 그는 평소 ‘서양철학’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법문을 할 때면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칸트 등 서양철학자들의 사상을 언급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했다. 이 같은 가르침은 서양철학에 익숙한 외국인들에게 더 쉽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스님은 종교의 목적은 ‘인간성 회복’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외국인들이 한국불교에 매료된 데는 불교가 인간성 회복의 길을 찾는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참여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스님은 학창시절을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는데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 그는 대학교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수많은 대립들이 난무하는 모습을 보며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주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산으로 들어가 1947년 마곡사에서 출가했다.

출가 후에도 철학뿐 아니라 유교경전, 불경 또한 탐독하며 그 진리를 찾고자 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러다 한 친구의 권유로 ‘금강경’을 접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국내외 활발한 활동
숭산스님은 수덕사 등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하며 깨달음을 얻고 춘성스님, 금봉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그는 이후 국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1958년 화계사 주지를 지내면서 불교정화운동을 펼쳤으며, ‘대한불교 신문사’ 초대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대한불교 조계종 비상종회의장 등으로 활동하며 승려 대학교육을 실시했다. 아울러 외국인 제자들을 위해 화계사에 국제선원의 문을 열었다.

이후 외국으로 건너 간 스님은 1966년부터 30여 년 동안 일본을 비롯한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에 선원을 세우고 한국의 선(禪)불교를 전파했다.

이 같은 활동으로 1985년 세계평화문화인대회(WUM) 세계평화상을 받기도 했으며,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듯 2004년 12월 4일 덕숭산 수덕사에서 진행된 스님의 영결식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1만여 추모객, 외국인 출가제자들 수십여 명과 재가제자들 수백여 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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