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권서 서상륜.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초기 한국 기독교가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주요요인 가운데 하나로 ‘성경의 번역과 전래’가 꼽힌다.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만주 등에서 성경의 일부가 우리말로 번역돼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 번역 성경이 민중들 사이에 퍼져가면서 기독교 신자가 생겨나게 됐다.

그런데 이같이 민중들 사이에서 성경이 전해질 수 있었던 데는 ‘권서’의 역할이 컸다. ‘권서’는 성서공회에 소속돼 성경을 팔고,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성경 판매원인 동시에 복음 전도자인 셈이다.

◆성경 판매원이자 전도자
1804년 영국성서공회가 설립된 이후 성경을 전파하기 위해 목적으로 만든 기구인 ‘권서’는 각 성서공회가 현지 교인을 권서로 둠으로써 외국인이 성경을 반포하면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줄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더욱이 당시 조선 사회는 서양 종교에 대해 엄격했기 때문에, 이 같은 권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권서는 보통은 일반적으로 건강한 중년 남성 중에서 선교사나 현지교회의 추천을 받아 해당 지역 성서공회가 선정했다.

단순히 판매하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라는 사명이 함께 어깨에 있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깊은 신앙심’이 권서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꼽혔다. 권서로 선정된 이후에도 특별훈련을 받고 시험을 치르기도 했고, 성서공회에서 직접 운영한 권서교육 기관도 마련돼 있었다.

이 교육기관에서 권서들은 실질적인 판매와 관련한 교육뿐 아니라,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 낯설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성경적 지식, 중국 고전 등을 배웠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권서로는 1882년 10월 대영성서공회의 권서로 임명받은 서상륜이 있으며, 이 외에도 1940년대까지 2천여 명이 권서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경회와 부흥운동으로
권서들은 각자의 역량에 맞게 할당된 성경을 들고 몇 시간 동안 돌아다니며 일했다. 처음에는 성경 66권 가운데 사복음서나 사도행전, 잠언 등을 주로 들고 다녔으나, 점차 성경전서가 발행되면서 이를 들고 돌아다니며 활동했다.

주로 식사는 자신이 싸온 도시락 등을 길에서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생활이 넉넉지는 못해 도시락이라고는 거의 찬밥과 반찬 한두 개였다. 이들은 하루 몇 시간씩 여러 집을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판매하고, 전도활동을 했다.

이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들이 끝까지 이 일을 했던 이유는 판매에만 그 목적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고 외진 산골까지 돌아다니면서 활동했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으면서 당시 놀라운 결과를 보여줬다. 스코틀랜드국립성서공회는 아시아의 권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성경과 권서가 한국만큼 환영받는 나라는 없었으며, 영혼을 개종시키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데 권서들이 그렇게 축복받은 나라는 없다고 믿었다”고 언급했다.

권서의 활동이 한국교회 설립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권서들에 의한 성경보급은 성경연구모임인 사경회 운동으로 이어졌는데, 이 사경회 인도자 대부분은 선교사 혹은 권서들이었다. 또한 이 사경회는 1907년 전후 ‘대부흥운동’을 이끌어내며 한국 기독교 발전에 초석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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