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베 신부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한 수감자가 울부짖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가 대신 지하 감옥으로 가겠다고 용감히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한 마을에서 독일 나치군에 체포된 콜베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강제 수감돼 있었다.

그러다 1941년 7월 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수용소에는 한 사람이 탈출하면 다른 수감자 10명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는 형벌이 가해졌다.

◆지하 감옥에서 생 마감
이에 탈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용소장은 죄수들을 불러 모은 후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갈 10명을 뽑았다. 이 10명에 속한 사람들은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끼고, 남은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나눴다.

그러던 중 10명에 뽑힌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아내와 자식이 있는데 어찌 죽을 수 있겠느냐”며 간절히 울부짖었고, 이에 콜베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다.

콜베는 자신이 수도생활을 하며 깨달은 그리스도의 정신은 사랑이었으며, 이렇게 대신 희생하는 길이 그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이에 그를 대신해서 죽겠다고 나섰다. 그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성서의 구절을 굳게 믿었다.

그렇게 콜베는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 속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에도 기적적으로 2주를 버텼다. 그러자 독일군은 독약을 주사해 콜베의 목숨을 끊었다.

그것이 47세 콜베 신부의 마지막이었다. 천주교 측에서는 그를 복자로 시복한 뒤, 순교자로 기록하고 성인으로 시성했다. 많은 천주교인들은 그를 희생으로써 사랑을 실천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우수한 성적 거둬
1894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16살에 콘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주목을 받았던 그는 로마로 유학을 떠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1917년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라는 수도회를 창설, ‘기도, 고행, 노동’을 신조로 삼아 수도회를 운영했다.

한때 교수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성모 기사회 활동을 위해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발행했는데, 처음에는 5천여 부로 시작했으나 점차 늘어나 1만 부, 5만 부, 1940년에는 100만 부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에서 선교활동
그러다 우연히 만난 일본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동양 선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1929년에는 일본에 와서 잡지 발행과 함께 활발한 선교활동을 해갔다.

그 후 6년이 지나 다시 폴란드로 귀국했으나 1939년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콜베를 비롯한 동료 수사들이 함께 수용소에 억류됐다. 그중 콜베 신부는 유대인을 도왔다는 죄가 더해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된 후 다른 수감자를 대신해 죽음을 맞이한 그는 그곳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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