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마시면 힘이 난다는 어느 음료 광고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젊은 직장인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들이켜며 사표를 쓰겠다고 하고, 이 모습을 본 백수는 직장이 있어야 사표라도 쓸 것 아니냐며 한숨을 쉬고, 내무반 침상에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신참 군인은 빈둥거리는 그 백수를 부러워하고, 다시 그 젊은 직장인은 저 때만 지나면 좋다며 졸병 군인을 부러워한다. 남들 눈에는 엄청 좋아 보이지만, 정작 자신들은 힘들어 죽겠다며 한탄을 한다는, 주위에서 흔히 보는 재미난 설정이다.

매일 “이 놈의 직장 당장 때려치워야지!” 하면서도 아침에 자동으로 눈 뜨고, 비몽사몽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집을 나서고,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서 시달리고 구겨진 채 헐레벌떡 회사 문을 열고 들어가 출근 도장을 찍는다. 많은 직장인들이 그렇게 산다.

젊은 사람들은 취업을 못해 난리고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다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한숨을 쉬지만,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으면서도 독립을 꿈꾸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상사가 지랄 같아서, 월급이 쥐꼬리만 해서, 출퇴근 시간이 길어서, 적성에 맞지 않아서, 못 다한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이유도 많다. 번지르르한 외제차 타고 몇 십 억 한다는 근사한 집에 사는 사람들 보면서, 신세 한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사표를 쓰려고 하면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입으로 쓴 사표만 수백 장이고 가슴속에서 되뇌인 사표만 수천 장, 심지어 윗도리 속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니며 언젠가 꼴 보기 싫은 상사의 이마에 탁 던져 버리리라 다짐을 해도,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당장 사표를 쓰지 않으면 숨이 넘어갈 것 같고 모욕을 견디며 붙어 있는 것이 치사하고 구차하다 싶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역시 그 모양 그대로 그렇게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처자식 때문이라고 위안하지만, 나가봤자 별 볼 일 없다는 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가의 각오’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연 새로운 사업을 벌여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성공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는데다, 그 계획을 은밀하고 구체적으로 구상하는 사이에 넌더리도 나고 지치지고 한다. 그래서 도약의 발판이 되었어야 할 분노도 차츰 가라앉고, 일 년쯤 더 생각해 보지 뭐, 하는 핑계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간다.”

많은 월급쟁이들이 이처럼 주저하다, 주저앉는다.

세상이 만만치 않다. 성질 고약한 상사 피해 다른 곳으로 가면, 거기에 또 그보다 더한 인간이 버티고 있고, 거저먹을 것 같은 일도 막상 해보면 아이쿠 하고 가슴을 치는 수가 허다하다. 직장이라는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면 이 세상이 다 내 것이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유로울 것 같지만, 찬만의 말씀이다. 우리 속에서 다박다박 받아먹던 먹이가 제일 맛나고, 그 그늘이 제일 안전하다는 걸, 뛰쳐나온 뒤에 알게 된다.

문재옥 시인의 ‘사투리 26’이란 시다.

‘새경 받아먹고 살 땐/ 허라는 일만 허면/ 심간은 편했었는디/ 내 농사랍시고 몇 마지기/ 농사를 벌여놓고 보니/ 속 타는 일만 많아 죽겠더구만/ 비가 오면 물코 걱정/ 병이 돌면 약칠 걱정/ 걱정 걱정 걱정뿐이더구만/ 머슴 팔자 상 팔잔디/ 쥐뿔도 못난 놈이/ 긁어 부스럼 만든 것 같고/ 없이 사는 게/ 제일 큰 행복인디/ 속알머리 없이 투정만 혀 쌓더니/ 오매, 지 발등 지가 찍었나 싶더니만/ 그런디 말이지 논에 벼가/ 누렇게 익어서 논두렁이 터질 듯/ 출렁거릴 때에는/ 입의 침이 고소해지더란 말이지/ 내 농사는 짓고 볼 일이여.’

이 시처럼, 결국 뒤가 좋으면 다행이다. 내 농사 한 번 지어 볼 만하다. 하지만 ‘새경 받아먹고 살 땐, 허라는 일만 허면 심간은 편했었는디’ 하는 말이 영 그른 말이 아니라는 것, 진짜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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