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 이상재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필경 세상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인즉, 이 불량(不良)한 것을 능히 다 통일해서 안정되게 만들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조선 청년에게 있으니까, 그게 내가 제일 큰 희망을 가지고 있어.”

월남 이상재(1850~1927)가 1926년 남긴 ‘조선 청년에게’라는 육성녹음 내용의 일부다. 일제강점기, 교육과 계몽운동을 통해 청년들에게 독립정신을 불어넣고자 했던 그의 신념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청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연설하기가 어려웠던 탓에 연설을 녹음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세계에서 가장 조선 청년의 도덕심이 뛰어나다’고 강조하며 외국 풍조로 그 도덕심이 변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고 ‘조선의 미래가 청년에게 있다’는 메시지를 간절히 전한다.

그는 그 누구보다 청년들을 사랑했으며, 청년들을 계몽하고 바른 길을 가르치기 위해 헌신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앞장서서 구국운동을 펼친 그는 조선 최초로 사회장을 지냈을 만큼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만년 청년’이라는 별명
일본 유학 중 신흥문물과 사회 발전상을 접한 후 개화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의 지도자로 활약하며 전국 각지에서 계몽, 강연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개화파 인사들이 대거 구금되는 ‘개혁당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또한 옥고를 치르게 됐다.

그는 이때 감옥에서 이승만이 전달한 성서를 읽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때 그는 기독교 신자가 되면서 “기독교가 아니면 이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38살, 다소 늦은 시기에 기독교에 입문했으나 그는 청년회에서 청년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늘 활기가 넘쳤고, 지칠 줄 모르는 활발한 활동으로 그에게는 ‘만년 청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YMCA 활동
한일합병 이후 그는 공직활동을 마무리하고, YMCA 청년회 활동과 선교활동에 헌신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총무를 역임하며 특히 인재 양성의 필요성과 계몽운동을 강조했다. 농촌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은 YMCA 활동을 통해 이룬 대표적인 운동이다.

그리고 YMCA 활동을 통해 구국운동을 계획했다. 전국에 각각 흩어져 따로 활동하던 기독교 청년운동단체를 통합해 조선기독교청년 전국연합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한국 YMCA의 전신이 됐으며, 평화구국운동의 중심단체로 발전했다.

그는 또한 3.1독립만세운동 당시 기독교 계열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6개월간 투옥됐다 풀려나기도 했다. 이후 1924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며 언론을 통해 민족 교육운동을 펼쳤고, 1927년에는 신간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생애 마지막까지 청년들과 나라를 걱정하며 녹음까지 남긴 그는 1927년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YMCA를 비롯한 수백 개의 사회단체들의 주도 아래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10만여 명에 이르는 군중이 참여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