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온갖 역사의 풍파를 겪으면서 국민의 정치의식이 감탄할 만큼 성장했다. 국민의 판단과 선택은 항상 아슬아슬 하면서도 절묘하다. 19대 총선 결과가 보여준 결과다. 정당들은 그래주기를 희구했겠지만 엿장수 마음대로 그러니까 엿장수의 가위질 장난대로 국민들이 놀아난 선거가 아니었다.

선거 결과를 비관하던 집권여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과반을 은근히 자신하던 야권이 쪼그라든 것은 결코 이변도 아니고 뜻밖의 일도 아니다. 적어도 야권의 압승이 물 건너갔다는 것, 그리고 승리라고 할 만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쯤은 냉정한 관전자들에게는 벌써부터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굳이 ‘이변’을 들먹인다면 야권보다 더 많은 의석을 얻는 것부터가 힘들어 보였던 집권여당이 과반의석까지를 거머쥘 만큼 약진한 것은 가히 이변이라 할 만하다.

이는 불신 받는 두 진영의 양자구도 선거에서 집권여당이 거둔 행운의 반사이익이었다. 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의 젊은이와 같은 젊은이들의 투표참여가 저조해서 야권이 불리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불신을 자초하고 국민을 불안하게 한 야권의 실책과 실수가 반 야(反 野) 민심을 광범하게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현 정부와 집권여당은 매섭게 심판 받아야 할 사안들을 무수히 안고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 정권은 집권 기간 내내 국민과 싸워왔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국민과 싸우는 것은 정치의 금기 사항 아닌가. 정권 말기에 접어들어서는 권력 기구 안에서 민간인 사찰이나 독직과 같은 각종 불법 부당하고 불합리한 일들이 연속해서 터졌다. 공교롭게도 선거철 타이밍에 맞추어서는 치안총수가 사의를 표명할 정도의 치안행정의 실수가 저질러져 정권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켰다. 북쪽의 잘못이 크지만 남북 관계도 파행이 지속되고 있다. 야권에서 볼 때 선거에서 압승하고도 남을 호재들이어서 더도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만 겸허히 활용했어도 집권여당이 차지한 만큼의 승리의 몫은 야당의 것이 됐을 것이라고 봐도 그리 어이없는 짐작은 아니다. 따라서 집권여당의 승리는 야권이 제 손으로 가져다 바친 것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보나 19대 총선은 야권이 혹 떼려다 혹을 붙이고 심판하려다 도리어 호된 심판을 당한 선거였다. 그 이유에 대해 지역주의나 2030 젊은 세대들의 투표율 저조, 공천 잘못, 나꼼수 출신 후보의 막말 파동과 같은 것들을 그 탓으로 돌리는 것은 수박 겉핥는 분석이다. 그것들은 지엽말단적인 이유들인 것이다. 야권 패인의 심저(深底)에는 답답한 현재로부터 희망적인 미래를 지향하고자하는 국민들을 ‘심판’과 같은 구호로 과거로 끌고 가고자 한 데 있다. ‘심판’이나 ‘복수’, ‘한풀이’와 같은 구호는 ‘미래 지향’을 빙자한 ‘과거 지향의 패러다임’이기 쉽다. 그런 구호를 요구하는 특수한 상황과 시대가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심판’이나 ‘복수’, ‘한풀이’가 국민들의 답답함이나 난국을 푸는 묘약은 아니다. 또한 국민들을 ‘에덴’으로 데려갈 듯 진보를 부르짖었으나 기실 그들의 진보에는 허망한 꿈뿐이지 구체적인 그림이나 뚜렷한 실체가 없다. 현재의 시대적 중심 가치와 보편적 국민의식에서 너무 멀리 일탈하는 이 같은 과거지향이나 미래로 가는 변화는 국민들을 현기증 나는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에 태우는 것과 같을 뿐이다. 국민이 원하는 중심 가치에 바탕을 둔 변화는 혁명과 같은 급변이나 과격함이 아니라 안정적인 변화다. 현상 타개와 변화 그 자체를 국민이 원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정체성을 달리하는 야권의 어느 큰 정당이 이념 편향적인 조그만 어느 정당의 지극히 작은 국민 지지율이 탐이 나 그것에 큰 몸통이 물려 ‘야권연대’라는 이름으로 끌려 다니며 고유의 정체성에 혼란을 빚은 것이 국민의 불안감과 경계심을 가중시켰다. 만약 그 공학적 산술이 단순한 계산대로 맞아 떨어졌다면 ‘심판’과 ‘복수’, ‘한풀이’가 얼마든지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민심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공학과 숫자놀이의 대상일 수는 없다. ‘되’로 얻었지만 ‘말’로 잃었다. ‘큰 것’에 편승한 ‘작은 것’은 '혁명‘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거꾸로 꼬리로 몸통을 흔들 정도로 ’되‘로 주고 ’말‘로 얻었다.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국민의 심판을 받는 선거에서 나름대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정당들이 연대해 한 몸통으로 선거에 나서는 것은 각 정당들의 존립근거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가버넌스(Governance)의 능률과 효율을 위해 선거결과를 가지고 정당들이 연대할 수는 있으나 선거 전의 연대는 일종의 국민에 대한 기만행위다. 그런 예는 민주국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더구나 19대 총선에서 나타난 야권연대라는 기묘한 결합체는 한미 FTA 폐기, 제주 해군기지 공사 중단, 심지어는 한미동맹의 폐기와 같은 경제의 명운과 국가의 안위에 관한 사안에 대해 아무런 대안도 없이 지극히 이념적으로 편향되고 모험적인 정책을 제시해 국민을 불안하게 했다. 어느 당의 예비후보는 제주 해군기지를 해적기지라고까지 부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망발을 하기도 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민심은 ‘중심 가치’를 중심으로 결집되고 야권으로부터는 민심이 이탈되어 선거 결과에 냉엄하게 반영됐다. 과거 역사가 아무리 굴곡지고 파행을 거듭해 왔더라도 그것의 유산과 부채들이 녹아들어 현재의 대부분 국민들의 의식과 생활의 토대가 돼있다. 이것을 일거에 부정하고 뒤엎어서 복수하고 권력으로부터 핍박받은 한풀이를 하려 한다면 그런 세력은 민심으로부터 왕따가 되기 쉽다. 이는 19대 총선 결과가 웅변한다.

남을 심판하려면 자신이 심판받을 일이 없어야 한다. 한미 FTA나 제주 해군기지는 애초에 누가 시작했나. 그것을 시작한 사람들이 지금의 집권정부를 심판한다면서 스스로의 원죄(原罪)는 부정에 나섰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고 나라 살림을 맡길 만한 책임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겠나. 국민은 이런 자가당착을 19대 총선에서 심판했다. 집권 여당과 집권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갑자기 신임으로 바꾸어 표를 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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