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범수는 진나라 사신 왕계의 추천으로 우여곡절 끝에 소왕을 만났다. 진나라 왕이 무릎을 꿇은 채 간곡하게 가르침을 바랬으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두어 번을 더 반복한 뒤에야 범수는 입을 열고 진나라의 잘못된 국정 운영을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소왕은 계속 무릎을 꿇은 채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외딴 곳에 있으며 나 자신은 어리석은 왕입니다. 선생께서 이런 나라에 찾아오신 것은 나로 하여금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종묘를 지키라는 하늘의 뜻입니다. 나는 그 하늘의 뜻에 보답하고 싶소. 그러니 내가 무엇을 꺼리겠소. 태후의 일이든 형제나 중신의 일이라도 개의치 마시고 나를 믿고 진실을 말씀해 주시오.”

범수는 소왕의 그 말에 머리를 숙였다. 소왕도 같이 예의를 갖추었다.
“진나라의 지형을 살펴보면 사방이 자연의 요새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북쪽은 감천, 곡구, 남쪽은 경수, 위수, 서쪽은 농, 촉, 동쪽은 함곡관과 상판을 가지고 국경을 견고히 하고 있습니다. 용감한 군사도 무려 백만 명이고 전차가 수천 승에 이릅니다. 이만하면 수비와 공격, 어떤 작전을 벌여도 가능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왕자의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백성들은 법을 충실히 지키며 적국에 대해서는 용감합니다. 이것 또한 왕자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두 가지 장점을 갖추고 계십니다. 이 국력을 배경으로 하여 제후들에게 임하면 명견 한노(韓盧)가 절름발이 토끼를 쫓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패권을 잡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대왕의 신하들 중에서 그 책임을 다할 사람이 없으며 지금까지 십오 년 동안을 계속하여 쇄국 정책을 고집하여 처음부터 함곡관 동쪽으로는 출전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왕의 형제이며 재상인 양후가 진심으로 나라를 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지만 그 책임은 대왕에게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얘기를 들은 소왕은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부탁하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시오.” 범수는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하들이 어전 밖에서 엿듣고 있는 것 같았다. 범수는 나라의 내정 문제는 미루고 우선 외교 문제를 건의하여 왕의 반응을 보기로 했다. 그는 왕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재상 양후는 한, 위 두 나라를 뛰어넘어 제나라의 강수를 공격하려고 합니다만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조그만 병력으로는 제나라를 쳐부술 수 없으며 대군을 모조리 동원하면 본국이 위험합니다. 그래서 대왕께서는 군사력을 되도록 적게 하고 모자라는 것은 한, 위 두 나라 군사로 보충하시려고 하지만 그것은 이쪽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계획 자체가 너무 안이합니다. 다른 나라의 영토를 넘어가 전쟁을 하면 어떻게 감당하실 작정입니까?
전에 제나라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민왕 시대에 남쪽의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를 무찌르고 사방 천 리나 되는 영토를 넓힌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제나라는 힘들여 얻은 영토를 모두 버리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 영토가 불필요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마침내 제나라는 국력이 쇠약해져 내분이 일어났고, 그때 제후들의 연합군이 공격해 와서 본토마저도 대부분 빼앗겼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일제히 왕을 탓하며 도대체 누가 이런 계획을 추진했는가 하고 추궁하자 왕은 전문(맹상군)이 한 짓이라고 대답하자 곧 반란이 일어났고 전문은 나라 밖으로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나라가 대패한 것은 멀리 있는 초나라를 공격하고 있는 동안 이웃 위나라의 전력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거꾸로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치의 땅을 얻으면 그 한 치가, 한 자의 땅을 얻으면 그 한 자가 대왕의 영토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먼 나라인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옛날 조나라는 사방 오백 리의 중산국을 공격하여 마침내 점령했지만 다른 제후들은 속수무책 그저 보고만 있었습니다.
이제 한나라나 위나라는 중원에 근거를 두고 천하의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왕께서 앞으로 천하를 호령하시려면 중원의 조, 위 두 나라와 친교를 맺은 다음 초, 조 두 나라에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초나라가 강하면 조나라를, 조나라가 강하면 초나라를 우선 이쪽 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초, 조 두 나라를 이용하면 제나라는 반드시 두려워하여 스스로 우호 관계를 맺자고 원할 것입니다. 제나라와의 제후가 성립되면 그때야말로 한, 위 두 나라는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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