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랑 꼭두박물관 관장

1995년, 옥랑문화재단은 미국 록펠러재단 산하 아시아 문화 협의회(ACC: Asia Cultural Council)와 예술가 지원 펠로우십 프로그램(ACC: OCKRANG Fellowship Program)을 체결하였다. ACC는 아시아와 미국 간의 문화교류를 통해 상호 간의 이해와 신뢰를 증진시킬 목적으로 시각예술 및 공연예술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단체이다.

내가 록펠러재단과 ACC의 존재를 알게 되고 또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서울예술대학 유덕형 총장의 소개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내 마음을 움직인 결정적 계기는 직접 뉴욕의 록펠러가(家)를 방문하면서 생겼다. 당시 록펠러 회장이 별세하고 부인이 재단을 맡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파티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게 된 것이다.

초대 손님이 100명 미만인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오래된 마구간을 연회장으로 고쳐서 만든 멋진 파티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파티의 주제가 마음에 들었다. 후원자들과 후원을 받은 예술가들이 서로 만나서, 지원의 결과를 확인하고 상호관계를 돈독히 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록펠러 부인은 “오늘의 식사가 아주 간소하게 준비되었다”며, “이렇게 절감한 비용은 예술가들의 후원금으로 쓰이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인사말을 전하였다. 나는 그 한마디에서 그네들의 삶의 원칙과 기준이 무엇인지를 한눈에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재단의 역할과 예술지원의 관점 및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ACC 입장에서 옥랑문화재단은 상당히 특이한 성격의 파트너였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대기업이나 거대단체가 파트너로 참여한 반면, 한국의 옥랑문화재단은 작은 민간단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파트너들은 한번에 3억 원 이상의 지원금을 내곤 했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ACC를 설득하여 예술가들의 연수기간 및 내용에 따라 지원액을 차등 지급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시켰다. 돈만 대는 지원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지원 프로그램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관여하며 ACC 관계자들을 괴롭혔다. 나중에 어느 관계자가, 옥랑문화재단은 돈은 가장 적게 내면서 요구조건은 가장 많다고 농담 삼아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의 그런 적극성과 진실성을 높이 샀기에 ACC가 옥랑문화재단과 손잡고 일했던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옥랑문화재단이 ACC의 국제교류 프로그램에 동참함으로써, 국내 문화예술인들은 해외연수의 기회를 얻어 보다 풍부한 예술적 경험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프로그램의 첫 수혜자로는 조명 디자이너 구윤영과 공연음악가 김기영이 선정되었다. 구윤영은 6개월 동안 뉴욕의 극장에서 현장 근무하며 조명 디자인을 익혔고, 김기영은 현대 전자음악의 산실을 돌아보며 현지의 음악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김기영의 경우, 뉴욕에서의 경험이 기대 이상이어서 너무나도 놀라고 흥분된다고 편지를 보내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후로도 무용연구가 안애순, 무대감독 김윤식, 무대감독 이종근, 조명 디자이너 정인배, 현대미술가 남기호 등이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들은 지금 한국에 돌아와 각 분야에서 이름을 알리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예술가들이 해외에 나가 현지의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경험을 쌓는다면, 분명 그만큼 한국의 문화예술 수준이 향상될 것이라고 믿었기에 나는 흔쾌히 지원을 계속해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예술경영과 예술지원의 핵심은 언제나 사람을 키우는 일 그 자체에 있다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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