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산스님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병이 있는데, 하나는 육신의 병이며, 다른 하나는 탐욕과 성냄과 같은 마음의 병이다. 육신의 병은 의술로 치료한다지만, 마음의 병은 어찌하겠느냐.”

의학전문학교 졸업을 앞둔 22살의 동산스님에게 용성스님이 물었다. 동산스님은 이 같은 물음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깨달음이 있어 졸업 후 범어사로 출가했다.

◆용성스님의 제자로 출가
‘의사’라는 장래가 평탄한 길을 두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불가에 입문한 동산스님은 ‘능엄경’ 등을 익히며 경학과 참선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이보다 앞서 그의 은사였던 용성스님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민족대표 33인으로 투옥됐다. 이에 3년간 옥바라지를 하며 은사를 극진히 모셨다.

용성스님의 출옥 후에는 오대산 상원사 선원, 금강산 마하연, 속리산 복천선원 등을 다니며 안거(安居) 등 수행에 정진했다.

그러면서 해방을 맞이했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에는 피난민들이 가득했다. 범어사도 배가 고파 참선하겠다고 찾아온 승려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에 다른 스님들이 양식이 부족하다며 스님들을 더 받는 것은은 무리라고 말렸으나, 동산스님은 “닭이 천 마리면 그중 한두 마리는 봉황이 나오는 법”이라며 찾아오는 스님들을 거절하지 않고 제자로 삼았다.

때문에 그의 밑으로 출가한 상좌가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 잘 알려진 성철스님을 비롯해 불교계에 큰 공헌을 한 스님들이 많이 배출됐다.

◆대통령도 호통 치는 ‘호랑이스님’
1952년 6월 6일 6.25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일 무렵, 부산 범어사에서 전몰장병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이날 법주였던 동산스님은 이승만 대통령이 원래 법회 시간보다 한 시간 이상 늦게 오자 화가 나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대통령이 법당 안에서 부처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유엔군사령관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동산스님은 큰소리로 “이것 보시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분이 감히 부처님께 손가락질을 한단 말이오!. 그리고 법당 안에 들어왔으면 누구든 모자를 벗어야 하오”라고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에 대통령과 함께한 사령관은 모자를 벗고 용서를 구했다.

◆작은 실수는 웃음으로 넘겨
대통령도 호통 칠 만큼 강직하고 무서운 스님이었지만, 제자의 작은 실수는 웃음으로 넘길 줄 아는 따뜻한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한 번은 종원 수좌가 조심스레 스님의 머리를 깎던 중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이 떨리면서 머리에 상처를 낸 일이 있었다. 종원 수좌는 평소 ‘금정산 호랑이’이라 불릴 만큼 엄하고 무서웠던 스님이라 걱정하며 사실대로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실수로 스님의 머리에 포를 뜨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동산스님은 “가서 얼른 소금 가져와라”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기왕에 포를 떴으니 소금도 뿌려야 상하지 않는다며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스님은 1929년 범어사 조실, 1936년 해인사 조실, 1955년 조계종 종정 등을 거치며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스스로도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며, 한국불교 발전에도 힘쓴 스님은 1965년 76세의 일기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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