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마리아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올해 김 마리아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김 마리아는 일제강점기 여성으로서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김 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10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을 이뤘을 것”이라는 도산 안창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가 보여준 독립에 대한 의지와 정신은 대단했다.

마리아는 세례명이자 이름으로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2.8독립선언 참여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여 전, 동경 유학생들이 먼저 한국의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바로 2.8독립선언으로 당시 일본으로 유학 가 있던 김 마리아도 다른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대회에 참석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며 지속적인 대일항쟁을 펼쳐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때 몇 시간의 취조를 받고 풀려난 그의 마음속엔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하게 끓어올랐다.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내에 전국적인 독립운동과 여성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 호소
이에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옷 속에 숨겨 2월 15일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그리고 기독교계 동지들을 찾아가 독립선언문을 보여주면서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렸고, 전 민족적인 독립운동이 필요함을 호소했다.

이 같은 사실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책임을 맡았던 이종일 보성사 사장의 비망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 마리아가 천도교 본부와 보성사를 찾아와 동경 한국인 학생의 구국열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본국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할 것을 힘써 권유했다.”

마리아 선생은 이뿐 아니라 황해도 등지를 돌며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간절히 호소했다. 그러던 중 3월 5일 정신여학교 학생들과 만세시위에 참여해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면서 일본에 체포됐다.

이로 인해 6개월간 여린 몸으로 갖은 악형과 고문을 받아 출옥한 후에도 계속 고문후유증에 시달렸지만, 여전히 조국독립의 꿈만큼은 놓지 않았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출옥 후 대한민애국부인회 회장을 맡으며 단체를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고, 침체된 여성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애국부인회는 투옥된 남녀 애국지사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의 보호하고, 임시정부 후원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같은 활동으로 또다시 체포와 고문을 겪은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1923년에는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뉴욕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며 근화회(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지냈다.

근화회는 미국에 사는 한인의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출판․강연 등으로 일본의 식민정책을 해외에 알리는 일,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해 보내는 일 등을 담당했다.

이같이 그는 일본과 우리나라, 중국, 미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며 일생을 독립운동을 위해 쏟았다. 하지만 1944년 3월 해방의 꿈을 보지 못한 채 고문후유증으로 53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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