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포삼열 목사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마포삼열(미국명 사무엘 오스틴 모펫, 1864~1939) 목사는 미국인임에도 죽는 순간까지 한국을 사랑했고, 그리워했다.

미국에서 생을 마감하며 그가 남긴 말은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3.1운동 등 격동기 속에서 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초기 한국교회 발전의 밑거름을 마련했다.

◆악조건 한국 땅으로 향하다
그가 선교를 위해 한국 땅으로 건너올 당시 우리나라는 시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었다. 각종 질병이 난무하고 외국인에 대한 배척 또한 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을 알고도 마포삼열 목사는 기도 중에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은 그는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 서울 땅을 밟았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 푸른 눈의 젊은이는 한국을 ‘사명의 땅’으로 생각하며 한국을 위해,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데 모든 일생을 바쳤다.

“나는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기 전에 황주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 있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십자가의 도(道)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오직 하나님의 그 뜻대로 죽든지 살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굳세게 결심했다.”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
그는 한국으로 와서 가장 먼저 한국어 공부에 몰두했다. 그리고 언더우드로부터 ‘예수교학당’을 인수해 교육사업에 힘을 쏟았다. 1893년부터는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 황해도 등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도 함께 설립해갔다.

훗날 평양은 한국교회사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평양대부흥운동’을 일으킨 곳이지만, 그가 선교할 당시만 해도 평양은 신앙의 불모지였다. 그 같은 곳에서 마포삼열 목사는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그의 이 같은 노력은 점차 결실을 맺었다. 처음에는 7명뿐이었던 신자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훗날 평양이 한국신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면엔 마포삼열을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의 공로가 있었다.

특히 그는 1901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해 목회자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1907년 평양대부흥’을 이끈 길선주 목사가 이 학교의 1회 졸업생이다.

그는 복음전파에 대한 사명감도 투철했지만, 한국에 대한 사랑 또한 특별했다. 그에게 한국은 단지 ‘선교지’라는 개념을 넘어 매우 사랑했고 아끼는 나라였다. 때문에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을 이루기 위해 함께 기도하기도 했다.

또한 ‘105인 사건’으로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자, 이는 날조사건일 뿐이며 비인도적인 고문 등이 자행되고 있다는 항의를 조선 총독에게 하는가 하면, 이 같은 만행을 미국 장로회 본부에 보고해 국제여론을 환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교육사업과 선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그를 향한 일제의 압력이 거세졌다. 이에 그는 다시 오리라고 다짐하며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1939년 미국에서 숨을 거뒀다. 마지막까지 한국을 그리워했던 그의 유언대로 지난 2006년 그의 유해를 서울 광장동 장로회신학대학교 교내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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