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기념관 김능진 관장. (독립기념관 제공)

“3.1운동 정신·가치 알리는 것이 현대판 독립운동이라 생각합니다”

[천지일보=김지현 기자] “할아버지는 감옥살이를 하시다가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님은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배다른 형님 한 분이 있었지만 같이 살지도 않았고 그때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지요.” 김능진 관장은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 일본 사람들의 앞잡이, 친일파가 판치던 시대에 김 관장 가족의 독립운동이 가문 안에서는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매우 곤란했다. 그에게 3.1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별로 없지만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에 대한 이야기와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우리 집안은 끝까지, 해방 때까지 창씨개명을 안 해 형님이 2년 동안 학교를 못 갔어요.” 그는 어른이 돼서도 창씨개명한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또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3.1운동을 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어렸을 때는 3.1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줄 알고 자랐다고 한다.

김 관장은 “독립운동으로 조부는 2년, 고모부도 2년, 삼촌은 6개월 옥살이를 했다”며 “그래도 특별한 독립투사라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 국민 전체가 다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부친은 당시 의대생으로 빨리 의사가 돼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할 형편으로 돈을 모아 만주로 피신해 체포를 면했다. 부친은 이후 의사로서 사회봉사에 헌신했다.

그의 가족은 할아버지 김병우 장로의 신앙적인 영향을 받아 사촌 40여 명이 다 기독교인이다. 그는 어머니가 기도하고 성경책 보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고 어머니는 자신이 교수, 박사가 되는 것보다 장로가 되기를 바라셨다고 한다.

김 관장은 평생 국립대 경영학 교수로 있었고 단 하루도 대학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며 공모로 관장이 됐다.

그는 “이곳 독립기념관이 단순히 일본과 싸운 역사를 나타내고 일본에게 침략 당하고 박해받은 것을 기억나게 하는 곳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현대사, ‘승리한 역사의 정신’을 담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창조해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는 1910년부터 100여 년 만에 선진국으로 발전했다”면서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등 질고의 과정을 거쳐 이렇듯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낸 근본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정신이며 그 정신을 담고 있는 곳이 독립기념관”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당시에는 총을 맞아 가면서 독립운동 하셨는데… 저는 관장직을 수행하는 것이 현대판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스스로 각오를 그렇게 하면서 그 정신과 가치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젊은이들에게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과거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시대와 간절한 애국심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지만 너무 몰라도 안 되지요. 과거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아 거울로 삼아야지요”라는 말을 전했다.

김 관장은 “3.1운동도 한류와 같다”면서 “중국과 일본, 인도네시아, 이집트, 인도의 간디와 타고르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민족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은 좀 더 나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얻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지만 3.1운동 당시엔 아무런 대가 없이 독립운동을 했다”면서 “당시 선열들은 그야말로 칠흑같이 깜깜한 상황에서(희망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한 것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된다”며 말을 이었다.

요즘의 국론 분열에 대해 안타깝다는 김 관장은 “똑같은 사실을 놓고도 180도 다른 의견들이 오가는 일이 참 많다”면서 “이런 때일수록 우리나라 전체를 놓고 크게 생각하고 넓은 안목으로 봤으면 좋겠다. 과거에 우리 선조들은 그렇지 않았다. 참으로 우리나라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가 생각했으면 좋겠다”며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김능진 관장의 조부, 김병우 장로의 독립운동
김능진 관장의 조부, 김병우(金炳宇; 1879.11. 7~1936. 2.10) 장로는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으로 1919년 3월 18일과 23일의 안동읍 장날을 이용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당시 이곳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기독교도와 천도교도가 연합함으로써 대대적으로 거사됐으며 김익현(金翊顯)·황인규(黃仁圭)·김계한(金啓漢)·김재성(金在成)·이인홍(李仁洪) 등과 함께 기독교도 대표로서 천도교도와 비밀 연락을 취하면서 거사계획을 추진했다.

3월 18일 오후 6시경 그는 1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하고, 이튿날 오전 1시경에는 또 다시 3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등으로 몰려가서 애국지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이다가 일제의 발포로 부득이 해산했다.

이 후 다음 안동 장날인 23일에는 더욱 격렬한 제2차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그는 이날 오후 8시경 3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해 읍내 중심지를 향하해 시위행진을 했다. 이때 일본 군경이 공포를 발사해 저지하려 했으나 시위군중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경찰서·지방법원 안동지청을 포위하고 투석으로 대항했다.

당시 일제는 무자비하게 사격을 감행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행하고 시위군중은 해산했다. 일제는 주동자 색출에 혈안이 돼 검거를 시작했으며 그도 마침내 체포돼 그 해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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