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천 이승훈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이번에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참된 뜻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좋은 기회네.… 천주교리만이 성현의 도(道)이며, 만물을 만들어낸 주인인, 오직 하나뿐이며 모든 일이 가능하신 천주에게 봉사하는 참된 교(敎)이네. 자네가 가서 이 같은 문제의 참된 뜻을 밝히고 자세히 살피고 오게. 인간이 죽느냐 사느냐, 영원히 행복하느냐 불행하느냐 하는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려 있네.”

이 같은 말을 들은 이승훈의 어깨는 무거워졌고, 자기가 맡은 사명을 반드시 이루고 말리라는 굳은 결심을 했다.

만천 이승훈(1756~1801)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다. 최근 천주교 인천교구가 인천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된 이승훈 묘역을 순례지와 역사교육의 장으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혀 ‘이승훈’이라는 인물에 다시 한번 관심이 집중됐다.

조선 땅에 조금씩 천주교의 싹이 움틀 무렵, 소수의 천주교 신자들은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렸다. 가지고 있는 몇 권의 서적만으로 종교를 접하다 보니 심층적인 탐구가 어려웠고, 조선사회와 서적을 통해 나타난 천주교사회 사이에서 오는 차이로 교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발견됐다. 이에 북경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이 같은 문제를 풀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때 선택된 사람이 이승훈이다.

◆아버지 따라 북경으로
황인점의 서장관(사신을 따라 보내던 기록관)으로 북경에 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이승훈 또한 함께 가게 됐다. 이에 이벽이 찾아와 북경에 가게 되면 천주당을 찾아가 교리를 자세히 살피고, 천주교 서적도 구해다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 1783년 12월 21일(음력) 북경에 도착해 약 40일 동안 머무르며 교리를 배우고 그라몽 신부로부터 영세(세례)를 받았다. 이때 그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이는 베드로처럼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리고 1784년 성서와 묵주, 천주교 서적 등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으로 돌아와 이벽 등에 세례
그후 이벽,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며 단시간 내에 우리나라에 많은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밀사를 통해 그라몽 신부에게 이 같은 상황을 전했다.

1785년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하며 한국 천주교회가 본격적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형리들에게 집회가 적발되면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며 첫 번째 배교를 했다. 그리고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왔으나 후에도 여러 차례 배교를 했다. 그러다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 정약용 등과 함께 체포돼 4월 8일 참수됐다.

때문에 그의 이력에는 배교, 순교 논란이 뒤따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배교, 순교 논란과는 별개로 이승훈의 공로는 한국 천주교 발전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승훈보다 앞서 젊은 선비들이 천주교를 먼저 접하기는 했으나, 그가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한국 천주교의 자생 발전에 탄력이 붙었기 때문이다.

참고-한국 천주교회사(유홍열 지음, 가톨릭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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