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봉준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동학이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다.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는 마땅히 물러나야 한다.”

◆민권ㆍ민족 지키고자 일어나
전봉준(1855~1895)은 어릴 적 체구가 작고 왜소해 ‘녹두(綠豆)’라 불리면서 훗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백성을 억압하는 봉건제로부터, 우리나라를 침탈하려는 열강으로부터 민권과 민족을 지키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민중을 이끌었던 지도자다.

그가 살았던 조선 말은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횡행하는 등 사회적으로 문란하고 혼란한 시기였다. 고부 군수 조병갑도 백성들을 약탈하고 그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거둬들여 자신의 배를 불렸다. 그리고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에게는 형벌을 내렸다. 이 같은 악행에 분노를 느낀 전봉준과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출발이다.

◆동학접주로서 활동
그는 30대 전후, 동학에 입교하고 동학접주로 활동했다. 훗날 그는 재판에서 “동학은 마음을 지키고 충효로써 근본을 삼으며,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밝혔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이 농민운동의 중심이 된 데는 ‘동학’의 사상과 닿아 있다. 교도들은 차별받고 억압받는 세상을 개벽을 통해 바꾸고자 했던 열망, 곧 모두 사람이 평등해지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곧 ‘후천 개벽’ 사상이 동학의 바탕에 깔려 있었고, 혁명을 통해 이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보국안민’ 내세운 동학운동
처음 봉기가 일어난 후, 주모자 색출과 함께 동학의 탄압이 심해지자 교도들은 다시 한번 일어날 것을 결의했다. 이때 총대장에 추대된 전봉준은 4가지 군율을 정하고 지키도록 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 것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것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깨끗이 할 것 ▲서울로 진격하여 세도가들을 몰아낼 것.’ 이 같은 군율에서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를 필두로 한 동학농민군은 계속적인 승리를 거뒀고, 그 기세가 점점 높아져 갔다. 하지만 청나라, 일본군이 조선 땅에 발을 들이며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정부로부터 12개의 시정개혁에 대한 약속을 받고 해산했다. 이 개혁안에는 탐관오리 뿌리 뽑을 것, 노비문서 불태울 것, 토지균분제 실시 등이 포함됐다.

이후 일본군이 내정에 간섭하려 하자 그는 의병을 이끌고 다시 일어났으나 일본군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같이 패색이 짙어지자 은신하며 새로운 일을 모색하던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됐다.

일본군에게 넘겨진 그는 서울로 압송됐고, 여러 차례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처형 전, 일본군은 살려달라고 말하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전봉준은 이를 거부하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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