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유니폼(Uniform)’은 우리말은 아니지만 우리말처럼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통용되는 외래어다. 학생들의 교복, 군인들의 군복, 운동선수들의 운동복 등이 흔히 보는 유니폼이다. ‘제복’ ‘정복’ ‘지정복’과 같은 훌륭한 우리말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외래어인 ‘유니폼’이 우리말처럼 쓰이는 것이 현실이다. 언어의 유출, 유입을 따져본다면 수출이 많은 우리의 무역거래와는 달리 밖에서 들어오는 언어의 유입이 유출보다 훨씬 더 많다. 이 같은 사정이 바뀌어 우리의 언어 유출이 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리말이 더 많이 통용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면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중심국가가 되는 날을 앞당겨야 한다.

‘유니폼’은 어떤 단체나 집단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소속감과 일체감,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입혀진다. 말하자면 이렇다. ‘유니폼을 입은 우리는 우리가 속한 단체나 집단의 일원’이므로 ‘우리는 하나’라거나 ‘우리는 동지다’와 같은 일사불란한 정체성과 일체감을 표현한다. ‘Uniform’이라는 영어 어휘를 구성하는 접두어 ‘Uni-’는 ‘하나(One 또는 Single)’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Uni-’가 앞에 붙은 ‘Unification’은 우리가 숙원으로 품고 있는 ‘통일’을 의미하고 ‘Unisex’는 남녀가 하나 같이 공용으로 쓰는 물건이나 패션을 말하게 된다.

유니폼을 입든 안 입든 ‘하나’라는 것, ‘하나가 된다는 것’은 소중한 가치다. 둘 이상이 모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주 질서와 같은 화합이고 조화이며 통일이므로 얼마나 좋은가.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친구가 있어 우의와 뜻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는 것, 성(性)이 다른 남녀가 하나로 조화돼 행복을 창조한다는 것은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이다. 더구나 반세기 이상 타의로 찢어져 살던 한핏줄이 오매불망하다 통일이 되어 하나가 된다면 그 감격은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둘이 서로 존중하고 포용하고 배려하고 이해할 때 가능하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부속돼서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가 됨’이 아니다. 따라서 유니폼을 입혀 둘 이상의 사람들을 이렇게 진정한 의미의 한마음 한뜻으로만 엮어낼 수 있다면 유니폼은 갈등과 질시, 적대감으로 들끓는 사람들을 하나로 화합하게 하는 기적의 옷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유니폼’은 접두어 ‘Uni-’ 다음에 붙는 겉모습을 의미하는 ‘폼(Form)’과 결합해 어디까지나 ‘통일되고 하나 된 겉모습’을 말할 뿐이다. 유니폼을 벗으면 각자는 본래의 복잡한 속내와 다양한 삶을 가진 자연인으로 되돌아간다. 가장으로 주부로 아들과 딸로 직장인으로 동네 아저씨로 혹은 채권자로 채무자로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다양한 모습의 공동체 일원으로 변신한다. 형식이 내용을 꼭 지배하는 것은 아니며 형식과 내용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유니폼은 일단 ‘형식’일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렇지만 유니폼을 입으면 아연 사람이 달라지고 또 달라 보인다. 의사나 간호사가 흰 가운을 입으면 전문 의료인으로서 신뢰가 간다. 경찰과 군인은 군복을 입었을 때 일반인이 의지하고 싶고 듬직한 경찰과 군인의 모습이 된다. 검사나 판사는 법정에서 법복을 입었을 때 자연인으로서의 냄새가 사라지고 위엄이 선다. 유니폼을 입으면 이렇게 사람이 달라 보인다. 또한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그 유니폼이 상징하는 일에 충실하게 되며 허튼 행동을 못한다. ‘유니폼’이라는 형식은 이렇게 ‘내용’을 지배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란해 보이는 다양성 사회에서는 유니폼을 입는 직군이나 조직, 집단이 많을수록 좋다. 그것은 혼란 속에서의 질서와 조화를 나타내고 신뢰의 근간이 살아 있음을 일반에 보여주어 안심하게 하며 삐거덕거리기 쉬운 다양성의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표현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유 민주사회에서의 일이다. 숨 막히는 획일사회의 경우라면 유니폼의 성격과 느낌은 완연하게 달라진다.

북한의 ‘아리랑 공연’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솔직히 말하면 명성이 아니라 악명이다. 특유의 유니폼을 입은 연 10만 명의 남녀 어린이, 학생, 노동자, 군인이 동원되는 이 집단 체조와 카드 섹션은 행사에 동원되는 대집단이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동작을 한다. 민주사회의 습성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볼 때 섬뜩함을 느낀다. 그렇게 사람을 기계처럼 훈련시켜 움직이게 할 때 거기에 동원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겠는가. 그 피땀이 밴 유니폼과 기계처럼 움직이는 전투적인 움직임에서 순수한 예술성을 느끼기는 어렵다. 참으로 무섭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품에 안고 ‘하나’가 되는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도전이며 민족적인 과업이다.

유니폼 중에 우리를 역사적으로 가장 섬뜩하게 했던 것은 ‘브라운 셔츠(Brown Shirts)’와 ‘블랙 셔츠(Black Shirts)’다. ‘브라운 셔츠’는 히틀러의 돌격대 유니폼이며 ‘블랙 셔츠’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민병대의 유니폼이다. 브라운 셔츠와 블랙 셔츠를 입은 이 파시스트들은 그 유니폼이 상징하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충성을 바쳐 침략 전쟁에 불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수천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국내외의 ‘이념의 적’들을 죽였다. 그렇듯이 브라운 셔츠와 블랙 셔츠는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유니폼이었다. 유니폼,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다양성 사회에서는 오히려 사회 구성 요소의 다양성을 상징하지만 획일사회에서의 유니폼은 획일성과 획일사회의 잔인성을 극명하게 표현한다.

어떤 정당의 공천 심사는 공천 신청자의 정체성에 관한 심사를 공천을 주고 안 주고를 결정하는 중요 항목으로 채점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미 FTA를 반대하느냐 않느냐, 경제 논리와 인간의 논리가 충돌할 때 어떻게 하겠느냐 등 요구하는 대답이 뻔해 보이는 질문들을 던졌다. 민주사회에서 그 같은 질문을 하거나 말거나 그 당의 사정이며 자유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의 이념을 가진 무슨 ‘전사’나 ‘돌격대’ ‘행동대원’을 모집하는 것 같다.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유니폼인 브라운 셔츠나 블랙 셔츠를 연상하게 한다. 그 같은 질문에 대한 일반 국민의 생각이 다양하다고 볼 때 그 당의 대표성은 그들이 요구하는 정답을 가진 국민으로만 제한된다. 그것이 선거 전략으로는 어떤 득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회 통합과 국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무슨 득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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