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마스쿠스에 있는 살라딘 동상.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붉은 십자 표시를 단 군사들, 성지 탈환, 200여 년간 지속된 종교 간 전쟁.’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로마 교황 우르반 2세가 ‘성지 회복’이라는 종교적 명분을 앞세워 성전(聖戰)을 촉구하자, 농민과 기사들이 결집해 붉은 십자 표시를 가슴에 달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갔다.

이후 십자군과 셀주크 투르크(이슬람) 간 오랜 접전이 이어졌지만, 결국 십자군의 성지 회복은 실패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들의 차지가 됐다.

당시 이 십자군에 맞섰던 인물이 이집트의 술탄(이슬람교국의 군주) ‘살라딘(본명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1138~1193)’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아랍국가뿐 아니라 서양 기독교계에서도 존경받는 인물로 꼽힌다.

서양에선 14세기에 그를 칭송하는 시들이 여러 편 나왔고, 독일 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희곡 ‘현자 나탄’을 비롯한 많은 문학작품에서도 훌륭한 인물로 묘사됐다.

◆서양에서도 존경받는 이유
기독교의 반대편에서 싸웠던 그가 서양에서도 존경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가 보여준 전장에서 보여준 성품과 관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1187년 10월 이슬람교도들이 십자군에 빼앗겼던 예루살렘을 되찾았을 때, 수장이었던 살라딘은 성 안 모든 기독교인을 살려주고, 부하들의 반대에도 원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도록 해줬다.

이 같은 모습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의 행동과 대조를 이룬 것이다. 1차 원정 당시 종교적 열의에 불타 오른 십자군은 수십 일간의 포위 끝에 예루살렘을 일시적으로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이슬람 사원을 불태우고, 성 안에 있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일부를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는 출정 당시 교황이 십자군에 참여하는 모든 병사의 죄를 사해줄 것을 약속했고, 종교적인 명분을 앞세웠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동이 신의 심판을 대신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십자군 전쟁이 정말 성전(聖戰)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살라딘은 군사지도자로서 전장에서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기도 했고, 수백 명의 포로를 처형하기도 했지만 감정적으로 무자비하게 대응하지는 않았던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에 재입성했을 때, 성 안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십자군이 행했던 무자비한 행동에 대한 보복이 있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그는 모두 살려줬을 뿐 아니라 다시 십자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도 종교적 적개심에 의한 학살금지를 명했다.

그는 적장으로 만난 리처드 1세가 전투 중 부상을 당하자 공격을 중단하고 개인 의사를 그에게 보내기도 했고, 전투 중 말을 잃은 리처드 1세에게 왕의 품위를 유지하도록 말 두 필을 보내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1193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숨을 거뒀는데, 죽기 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그는 이런 모습 때문에 청렴한 지도자로도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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