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랑 꼭두박물관 관장

계간지 <꼭두극>은 수필가 이경희 선생께서 창간한 잡지로서, 내가 꼭두극단을 운영할 당시에는 휴간된 상태였다. 어느 날 잡지 <춤>의 발행인인 조동화 선생께서 나에게 <꼭두극> 잡지를 이어받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주셨다. 84년부터 극단을 운영하면서 마침 나는 꼭두극의 수준향상과 보급확대를 위한 전문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경험도 운영자금도 없던 내가 <꼭두극>을 복간하며 덜컥 잡지 발행의 길로 뛰어들게 되었다. 1986년의 일이다.
잡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게 힘이 되어주신 분은 이미 고인이 되신 한창기 선생이셨다. <뿌리 깊은 나무>의 발행인으로 한국 잡지사에 큰 획을 그은 그 분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계신 곳이 당시 인사동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나는 시간만 나면 원고지를 들고 가서 자문을 구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께서는 쉽게 답을 주지 않고 오히려 나의 생각을 듣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본인이 쓴 글에 대해 나의 솔직한 평을 요구하고 경청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 선생님과 나는 골동품 모으는 취미도 비슷했다. 둘이 같은 물건을 동시에 보고 먼저 사려다가 서로 다투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분이 이제는 안 계시다고 생각하니, 삶의 빈자리가 너무 큰 것만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의 이 시절은 여러 원로 선생님들을 찾아뵙고 귀동냥, 눈동냥, 지식동냥으로 많은 것을 배우던 때였다. 그분들은 나의 온갖 재롱을 너그럽게 봐주시면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는 안목을 나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배워가면서 만든 <꼭두극>은 세계 각지의 꼭두극을 폭넓게 다루는 잡지였다. 예컨대 한불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특집에서는 프랑스 꼭두극과 연극적 상상력에 관한 공연물을 소개했으며(1986년 여름호), 직접 일본의 오사카에 가서 꼭두극과 관련 페스티벌을 취재하기도 하였다. 세계의 꼭두 공방을 탐방하는 시리즈를 위해 일본의 인형극단을 방문한 적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무척 놀랐었다. 왜냐하면 1987년 당시에 우리가 상상조차 못한 전문공방이 이미 일본에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인형의 제작, 분장, 의상 등 모든 과정이 체계화 되었으며, 단원들도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이에 자극 받아 나도 일본과 파리 등지로 단원들을 연수 보냈다. 그때 그 단원들이 지금은 인형극단을 운영하거나, 방송국의 어린이 프로그램 인형제작자로 근무한다는 소식을 듣곤 한다.

세계 각지의 꼭두극을 다루는 와중에도 우리 꼭두극에 관한 기사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86년 가을호의 특집은 ‘우리 얼굴, 우리의 탈’이라는 제목이었는데, 탈과 꼭두극의 관계를 조명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가면이 호우총 출토의 신라시대 목심칠면이라는 것, 가면극이 6세기경에 이미 신라나 백제에 있었으며 가면 혹은 탈을 일컬어 ‘덧뵈기’라고도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우리 꼭두극에 관한 논의가 충분히 자리 잡지 않는 한, 세계 각지의 꼭두극에 관한 지식은 자칫 공허해질 수 있다고 여겼기에 잡지는 우리 꼭두극과 세계 꼭두극을 아우르는 일관된 방향을 고수할 수 있었다.

계간지 <꼭두극>은 관련 공연 및 전시회, 좌담 등을 보도하는 한편, 한국 꼭두극계가 나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한국 꼭두극의 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숨어있던 꼭두극 전통의 자료와 소재를 발굴하고, 그것을 계승할 방도를 찾으려 했다. 결국 <꼭두극>은 1986년 3월 봄호부터 1988년 여름호까지 총 10권이 발간되고 중단되었다. 혼자서 취재, 발행, 편집을 도맡은 데서 오는 과다한 업무량, 그리고 만성적인 적자를 더 이상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의 대학 도서관과 문화예술단체에 잡지를 무료로 보내는 데 따른 우편 값조차 만만치 않았을 정도였다.

중단되긴 했지만 결코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대중들에게는 낯선 내용이었으나, 연극과 인형극관계자들에게는 값진 학술적 자료였다. 무엇보다 잡지 발간으로 인해 그동안 미개척 분야였던 꼭두극이 비로소 논의의 장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후의 공연이나 꼭두 연구에도 훌륭한 밑거름이 되어 준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아쉽게 발간을 중단해야 했기에 <꼭두극>은 늘 내 마음 한 켠에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그 아쉬움을 나는 요즈음 꼭두박물관의 소식지인 <꼭지>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88년 여름, 10호를 마지막으로 휴간되었던 <꼭두극>이 22년 만인 2010년 여름에 <꼭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제호가 바뀌긴 했어도 <꼭지>는 사실상 <꼭두극>의 정신적 계보를 잇고 있다.

1차적으로는 꼭두박물관 소식지이지만, 결국 꼭두를 통해 한국문화의 속살까지 살펴보는 문화예술 전문지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는 모바일 시대에 발맞춰 어플리케이션으로 제작된 <꼭지>를 읽을 수도 있다. 실제로 첫 어플리케이션의 경우 두 달 만에 누적 다운로드 수 3만 건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국내를 넘어 세계로 무대를 넓히고 있는 <꼭지>이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꼭두극>과의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오래 전 <꼭두극>에서 다루었던 의미 있는 논의들과 역사적 숨결을 조만간 다음 <꼭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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